어떤 그림은 일주일 만에 끝나고, 어떤 그림은 해를 넘긴다. 어떤 것은 끝을 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시간의 길이가 곧 의미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오래 걸리는 것들은 나를 오래 붙들고, 그것들이 나를 더 오래 바라보게 한다.
나는 사람과 풍경을 그린다. 사람을 그릴 때는 자료를 쌓고 사진을 옆에 놓아 얼개를 만들어 본다. 노동은 약속이고 규칙을 따르는 일이며, 형식이 자리할 때 비로소 무언가 움직인다. 풍경은 다르다. 그것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온다. 내 안의 잔상들과 상상이 먼저 손을 뻗으니 멈춰 있는 시간이 더 길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그림은 잠을 잔다.
어느 순간 아주 사소한 빛이 온다 — 신호등의 파란불 같은 것. 그 빛이 켜지면 다음 갈 길이 어렴풋이 보이고 손을 댈 용기가 생긴다. 방향은 우연과 결심 사이에 있고, 완성이 불가능해 보이면 나는 뒤로 물러난다. 물러남은 도망이 아니라 그림에게 시간을 주는 행위다. 막다른 곳에 닿으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고,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틈이 생기지 않는다. 오래 붙잡아 온 형식을 부숴야 새 형상이 들어온다 — 내게 부수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교체의 의례다.
지금 손을 댄 그림도 한동안 쉬었다가 며칠 전 다시 붓을 잡았고 오늘은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한 군데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을 고치려 하자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결정은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흔드는 일이고, 뜻밖에도 그 소동을 가라앉힌 것은 새로운 상상이었다 — 내가 몰랐던 내 안의 상상. 용기 부족과 길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상상을 막았지만, 그 상상은 도와주었다.
나는 식물에게 위안을 얻는다. 나무와 풀은 형태의 실수를 너그럽게 감싸는 법을 알고, 사람에게 형식을 맞추려 애쓸 때보다 식물 앞에서는 비틀고 부수고 다시 세울 수 있다. 본 것과 상상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가 보여야 그 다리를 건넌다. 영감이라고 부를 만한 순간-다음 징검다리가 보이는-이 오면 나는 기다리기보다 기뻐하고, 그 기쁨을 기록한 뒤 다시 붓을 든다. 내가 시간을 주고 물러서고 다시 붓을 드는 모든 일은 결국 기억의 틈에 상상을 심기 위한 몸의 언어다. 그렇게 자라난 상상들이 내 풍경을 이루고 그 풍경들이 서로 만나 조용히 이야기를 건네기를 바란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자신의 기억 틈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업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