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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워시 시뮬레이터>를 하며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면

...이상할까?

by 김종화

<파워 워시 시뮬레이터>라는 게임이 있다. 말 그대로 고압 세척기로 찌든 때를 날려버리며 무엇이든지 청소하는 게임이다. 현실 노동만으로도 벅찬데 무슨 게임에서까지 돈 주고 노동을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려 300만 장이나 팔린, 많은 인기를 얻은 게임이다. 그런 게임이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사서 플레이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에 구독한 게임 구독 서비스에 나타났길래 가벼운 마음으로 찍먹 하듯 게임을 플레이해 봤다.


게임은 말 그대로 ‘고압수로 세척하기’라는 동사를 끝까지 밀어붙인 것 같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찌든 때로 뒤덮인 소형 벤 차량을 청소한다. 차량은 부위 별로 세세하게 나뉘어 있어서, 내가 현재 세척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이며,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오염도를 보여주는 UI바로 알 수 있다. 오염도가 일정 이하로 내려가면, ‘반짝!’ 하는 만족스러운 이펙트와 함께, 해당 부분이 완전히 깔끔하게 바뀌며, 보상으로 일정양의 돈을 얻는 방식이다. 돈으로는 수많은 세척기, 노즐, 재질 별 세척액 등을 살 수가 있으며, 각각의 세척 도구는 저마다 쓰임새가 다르다. 세척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자동차나 바이크, 놀이터 같은 일상적인 사물부터, 화성 탐사 로버, 워해머 4K에 나오는 가상의 우주 탱크까지 무궁무진하다.


ss_8782c713c59761ebaacabb214672655a1599ce79.1920x1080.jpg 파워 워시 시뮬레이터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1290000)

세척 과정은 단순히 물을 뿌리는 것 이상으로, 세척하는 사물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게임에서 세척하는 사물은 단순히 ‘무엇’이 아닌, 이를 이루는 파츠 하나하나 별로 이름과 오염도가 표시된다. 예를 들어 바이크라면 그냥 ‘바이크’가 아니라, 핸들, 프런트펜더, 브레이크 호스, 프런트휠 같은 세부적인 파츠들이 각각 나뉘어서 오염도가 표시된다. 복잡한 사물일수록 이를 구성하는 요소가 다양하고, 생소한 명칭의 파츠가 종종 나타난다. 전체 오염도 상황을 보여주는 화면에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파츠에 약간의 오염도가 남았다면, 그 파츠를 찾기 위해 사물을 이리저리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과정에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그 파츠의 이름과 생김새, 위치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늘 애를 먹이는 것은 마지막 남은 1% 의 오염도를 찾을 때이다. 어딘가 남아 있는 티끌만 한 때를 완벽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세척하는 사물을 매우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대충 봐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남아 있는 때를 찾아내기 위해, 플레이어는 공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엎드리거나, 포복해서 올려보거나,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세척하는 사물을 들여다보며 남은 때를 세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디가 움푹 들어가고 나오는 등 사물을 이루는 쉐잎 하나하나가 ‘어떻게 들여다봐야 할까’를 고민하고 실행하게 하는 플레이의 중요한 요소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비록 아무 실체가 없는 가상의 사물이지만, 가끔 손세차를 할 때 내 차에 찌든 때가 고압수에 씻겨 내려가는 것을 볼 때 느껴지는 묘한 쾌감이 이 게임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시간제한의 압박도, 걸리적거리는 세척기의 호스도 없이, 오로지 마우스로 호스를 움직여가며 찌든 때를 벗겨내는 단순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의 때까지 씻겨 내려가는 정도는 아니지만 꽤 잡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주말에 손세차하는 것이 유부남들의 주말 힐링 액티비티이자 취미라고 하던데, 그게 꽤 이해가 갔다. 양손이 사물을 들여다 보고, 세척하는 단순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그저 게임 속 가상의 3D 모델에 이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경우가 있었던가? 아니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나 세심하게 들여다본 경우가 있었던가?


이는 역시나 찍먹 하듯 플레이해 본 <디아블로 4>에서, 3D 아티스트들이 엄청나게 공을 들여 만든 디테일한 배경들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그저 ‘배경’으로,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무관심하게 넘어가버린 경험과 정확히 대비됐다. 평소라면 있는지 조차 몰랐을 수많은 파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찾아서, 유심히 들여다보고, 인식해 주는 이런 행동의 대상만을 사람으로 바꿔 본다면 어떨까? 누군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자세하게, 깊이, 여러 각도에 들여다보려 하고, 그저 지나칠 수 있는 부분 하나하나를 인식해 주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키워드와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사랑한다는 것은 자세히 들여다봐주는 것 아닐까? 아니 세차하다가 갑자기 사랑이라니 이거 좀 이상한가?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사랑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쓰다 말았던 이 글이 생각났다. 여러모로 내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지대한 관심은커녕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오글거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생각만 해도 오글거린다. 하지만 누군가 나의 세세하고 이리저리 얽힌 모습을 자세히 깊이 들여다봐주려 할 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경험을 통해 생각해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사랑은 ‘자세히 들여다봐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파워 워시 시뮬레이터>를 하며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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