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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Jun 01. 2022

엄마의 첫 SNS, 곽진영

아빠의 첫 sns를 꿈꾸며.

아내가 두 번째 책을 냈다. 첫 번째 책의 키워드가 ''이라면 두 번째 키워드는 'sns'다. 누가 봐도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의 공통점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최소한의 연결고리로 작가의 색깔을 맞추어야 되지는 않았을까라는 남편으로서의 노파심이 생겼다.  숲이랑 sns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이 세상 끝과 저세상 끝에서 무슨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까.

책을 읽기 전에 들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개인적으로 sns에 대한 나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sns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미니홈피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모두가 도토리로 미니홈피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에도 나는 미니홈피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미니홈피에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에너지를 쏟는 모습을 비판했었다. 

'그럴 시간에 실에 더 집중을 하지.'

디지털 세상에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현실에서 못 이룬 욕구를 대리 충족하기 위한, 현실에 부족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현실에 엄청 집중하고 열심히 살았던 거도 아니면서. 그저 새로운 문화에 대한 반감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sns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꼰대의 자기 합리화일 수 도 있다. 수많은 일촌과 소통하는 인싸들에대한 부러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냉소적인 마음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서 클릭을 유도하기 위한 자극적인 문구와 란한 영상과 사진들만이 눈에 띈다. 더 이상 sns는 정보의 바다가 아니다. 정보의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다. 이런 악순환은 가속화되어 오로지 구독자수와 팔로워수, 조회수가 목적이 되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나를 표현하는 것은 남을 위함이고, 진리의 표현은 재미를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sns 세계에서는 ''도 없고 '진리'도 없다. 찾을 수 있다 해도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이다. 그래서 나는 바늘을 찾기 위해 굳이 sns에 접속하지 않는다. 의미 없는 클릭과 눈요기용 영상을 뒷목의 뻐근함과 맞바꾸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 sns에서는 ''만 있고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sns가 키워드인 아내의 책이 두 손에 놓여졌다. "엄마의 첫 sns" 제목도 제목이지만 제목 위의 한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나다운 모습을 찾아서


sns에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냥 sns를 처음 시작하는 엄마들의 위한 지침서 정도로만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sns인싸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나 자신숨겨야만 한다. 남들의 눈에 띄어야 하기 때문에 좀 더 자극적이거나 있어빌리티가 부각되어야 한다. 거기서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로 책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 순간,

'그래. 이건 아내의 책이었지.'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아내의 '책'임을 잠깐 망각했다. 비판의 눈초리는 접어 두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 대신 아내의 안목을 믿고 순수한 마음으로 책장을 다시 펼쳤다.




저자는 sns를 말하는 데 있어 가면을 얘기한다. 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를 어떻게 얘기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자가 얘기하는 가면과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 

사회 속의 구성원으로서 우리 모두는 사회적 의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난이도가 극악인 직장인이라는 가면으로부터 시작해서  직장동료, 선배 ,  후배, 아들, 남동생, 남편, 아빠, 학부모,  친구, 브런치에서는 부푼돛 등. 셀 수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꽤 많은 가면을 쓰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어떨 때는 이 가면을 썼다가, 어떨 때는 이 가면을 벗고 저 가면을 쓴다. 그때마다 가면을 바꿔 가며 사회에 충실한 일원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 보니 가면이 잘 벗겨지지가 않아 힘든 경우도 꽤 있다. 결국엔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진짜 나의 모습인양 착각하는 경우도 있으니, 나의 진짜 모습과 가면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심각한 박탈감이나 상처가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가면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고 본연의 모습으로 sns에 자신을 표현하라고 충고한다. sns세상의 또 다른 가면 하나를 추가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가면을 모두 벗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집중해서 민낯의 가장 '나다운 나'를 찾는 수단으로써 sns를 사용하라는 메시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닌 ''를 위해서 sns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초반 아내의 첫 번째 책의 숲과 이번 책 sns의 연결고리는 바로 이것이다. 숲과 sns은 단순한 목적이 아니다. 수단과 방법이다. 진정 나로 향하는 통로인 것이다.

나를 표현하고 나의 욕망에 충실하다 보면 가장 나다운 나를 만날 수 있다. 책의 표지의 문구가 현실이 되어 등의 날개뼈 근처가 근질근질해질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가장 나다운 모습인 나비로 변하여 하늘로 날아오르는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아내의 온라인 별명은 나비 날다 줄임말인 나날이다).


내가 그토록 찾기를 열망하던 자유를 sns 통해 이룰 수 있다. 이제는 그런 시대다. sns를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마냥 앉아서 비판만 할 수는 없다. sns는 단순한 네트위크가 아니다. sns는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에서의 '행동'이자 '표현'이다.  책을 다 읽고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에 흠뻑 빠져버리고 싶다는 꿈틀거림이 나를 설레게 한다. 여기서 수익구조는 덤이다. 자유, 설레임, 돈. 이보다 더 짜릿할 수가 있을까.

아,  이보다 더 짜릿한 것이 기는 하다. 그것은 책 전반부, 남편(나)에 대해 언급하며 고마움을 세상에 표현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자유, 셀레임, 돈보다 나에 대한 아내의 감사한 마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책을 다 읽고 생각을 곱씹어 볼수록 인풋과 아웃풋을 분리할  수 없음에 머릿속의 돌이 깨지고 무릅팍이 된다. 별개의 것으로도 훌륭하지만 인풋을 바탕으로 한 아웃풋, 즉 세상을 향해 진정한 나를 표현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인생이라는 거대한 그림에 방점을 찍을 수 있는 화룡정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이 기회를 빌어 아내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세상에 고하노라. 아빠의 sns를 통해서 말이다.


두 번째 책 축하합니다. 집안일하랴, 애 키우랴. 힘든 상황에서도 이렇게 책도 쓰고 열심히 잘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불완전한 서로가 서로가 있음에 완전히 하나가 되는 존재로의 열망이 사랑이라고 했던가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할수 밖에 없습니다. 내 옆에 존재함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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