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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20. 2023

#21. 내게 힘이 되는 물건들

나를 둘러싼 부적 같은 지원군

역사가 있는 물건들은 결계를 치듯 나를 둘러싸 혹독한 세상의 바람을 막아주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어깨를 토닥인다.




남편이 가죽공예를 배울 때 만들어준 큼지막한 갈색 가방을 몇 년째 매일 가지고 다닌다. 가방 안에는 동생이 만들어 준 빨강머리 앤 캐릭터가 그려진 파우치가 있고, 그 안에 화장품과 티슈, 자동차 열쇠 같은 잡동사니가 들어있다.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에는 엄마가 이십여 년 전에 나와 동생에게 똑같이 맞춰준 실반지가 끼워져 있다. 사무실 책상 유리 밑에는 아들이 여섯 살 때 그려 준 조그만 괴물 그림이 있다.

이런 것들은 내게 힘이 된다.


늘 사용하는 것들이라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치지만 의도하지 않아도 눈앞에 왔다 갔다 하니 익숙해진다. 그러다가 문득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역사가 떠오르면 따뜻한 기운에 잠깐 마음이 충만해진다. 그것은 아주 잠깐 왔다가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그런 정서는 쌓여서 하루살이를 단단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힘이 되는 물건들이 꼭 남이 준 것일 필요는 없다. 나를 오래 봐 왔던 것들, 나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들도 내 일상을 지키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사용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은 내 갈색지갑이 그런 것 중 하나다.

일본 여행을 하던 중 갑자기 비가 왔다. 우산이 없어서 주변 가게로 뛰어들어갔는데 가죽 물건을 파는 곳이었다. 알고 보니 현지에서는 꽤 오래된 가죽 브랜드 상점으로, 정교하고 단정한 지갑과 가방류들이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가격도 많이 비싸지 않아 구경하다가 갈색 지갑을 하나 샀다.


지갑은 몇 년을 사용해도 바느질이 해지거나 지퍼가 고장 나는 일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니 때가 타고 낡기는 했으나 버리고 싶지 않아 가죽 버닝을 하는 곳에 맡겨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거의 지갑 가격만큼의 비용을 지불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지퍼가 고장 날 때까지 쓸 생각인데 지퍼는 여전히 부드럽게 잘 열리고 닫힌다.


매일 여러 번 만지는 지갑이 어떤 날은 눈에 훅 들어와서 한참 바라볼 때가 있다. 그런 시간들은 전시회를 보는 것처럼 일상의 휴식이 된다.


저렴한 플라스틱 만년필의 잉크를 여러 번 다시 채워 쓰다 보면 정이 든다. 그러면 그 물건은 삼천 원만 주면 다시 살 수 있는 플라스틱 만년필이 아니라 내 물건이 된다. 잘 깨지는 뚜껑 입구에 튼튼하라고 마스킹 테이프를 둘러주었더니 더 예뻐져서 딱 내 것이 되었다.  


나를 오래 봐 왔던 역사가 있는 물건보잘것없으나, 나에게는 든든한 백이다. 그것들은 결계를 치듯 나를 둘러싸 혹독한 세상의 바람을 막아주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어깨를 토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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