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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 진 May 26. 2024

나만의 답을 찾아 떠났다.

먹고사니즘은 그만!

그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났다. 

다니던 직장에서 지속적으로 방광염에 시달리던  정희는 상사와 갈등을 빚은 후 사직서를 제출했다. 소통이 안 되는 게 문제라고 합리화했지만, 사실은 탈출할 핑곗거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인수인계를 마치는 날짜에 맞추어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숙소와 비행기, 그리고 산티아고라는 목적지 외에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역시 비행기는 창가석이지!"



이륙 때만 해도 창가자리에서 밖을 내다보며, 드디어 떠난다는 설렘을 만끽했다. 유럽 여행이 처음인 정희는 장시간의 비행동안 이코노미석의 창가자리에 앉으면, 화장실에 갈 때마다 옆사람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기, 잠시만요..."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참다 참다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정희는 옆에 나란히 앉은 낯선 두 남자에게 자신의 배변활동을 꼬박꼬박 보고해야 하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이 모든 것이 경험의 부재구나. 제주도에 갈 땐 창가석이 최고였는데...'


'단 며칠 전의 나였다면...?'


잠시 실례한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워 얼굴부터 귀, 목까지 홍당무처럼 벌게져 안절부절못했을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정말 모든 것이 별거... 아니구나... 난... 여태 왜 그러고 살았을까...'



수줍음 많은 정희에게 이런 모험이, 용기가 나올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만약 장소가 사방이 막힌 비행기가 아니었다면...

다 때려 치우자라는 자포자기 심정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교양 있고 품위 있어 보이고 싶은 자신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깨지 못했을 정희다. 합리성을 유난히 중요시하는 고정된 정희의 틀을 깬 것은 배변처럼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활동에 의해서이다. 정희는 이 아이러니 속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오랜 시간 옥죄된 단정한 정장과 스타킹을 벗어던진 것처럼. 자신이 이상향으로 설정한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탈처럼, 의외의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언젠가 인터뷰 속 그녀를 보며 궁금했던 노브라를 하면 이런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희철은 14시간의 비행기 안 짝꿍이 된 정희를 관찰하는 일이 즐거웠다. 이륙하고 한동안은 들뜬 여행객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더니 어느 순간부터 긴장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도 1시간이 지나서야 '톡톡' 작은 새가 부리가 창문을 노크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팔을 두드렸다. 


희철이 쳐다보자 수줍은 얼굴로 "저기 잠시만요..."라며 작은 입을 열었다.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용건이 확실하다. 웃으며 다리를 곧추세워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희철은 입꼬리가 설핏 올라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던 건가?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네.'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정희가 걸어오는 모습이 희철에게는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정희에게 눈길이 가는 스스로가 희철은 의아했다. 뛰어난 미모도 아니고 평소 희철의 이상형인 청순하고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사람도 아니다. 조금 우아한 느낌은 있지만, 그동안 희철이 만나온 여성들보다 10살은 많아 보였기에 그 연륜에서 오는 적정한 태도에서 나오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주변과 섞이지 않는 묘한 분위기가 정희에게는 있었다. 정희는 순간순간 천진한 표정을 지었는데, 전체적으로 흐르는 중년의 성숙한 분위기와 어울리기 어려움에도 스치듯 보여주는 상반됨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덕분에 인천에서 애틀랜타로 가는 14시간의 비행이 무료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애틀랜타를 경유해 산티아고로 향하는 10시간 동안 희철은 정희를 떠올렸다.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정희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생의 첫 유럽, 생의 첫 비행기 경유!

처음 하는 경험들로 온몸의 세포가 긴장상태였다.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다. 


그저 이곳에 오면, 무작정 걷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물음표 투성이로 살았던 한국에서의 삶.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경험과 지혜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물음표를 안고 길을 떠나며, 산티아고에서는 답을 가진 사람을 만나거나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희망주문을 걸어두었다. 



답이 보이지 않아 계속 질문을 던지던 자신이 희철을 만나며 답이 없는 인생과 세상을 불안해하고 외로워하기보다 마음을 섞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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