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을 통해 얻은 점 4
이번 글은 내가 박사과정을 통해 얻은 네 가지 중 마지막 편!
1. 나의 성향과 호불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됨 (첫 글)
2. 박사과정 하면 어떨까, 학계는 어떨까 하는 미련 없어짐 (첫 글)
3. 깊이 있게 하는 연구의 중요성, 비판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약간 체화됨 (두 번째 글)
4. 사이드 프로젝트로 다양한 경험과 즐거움을 얻음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박사과정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인 것 같기도 하다.
원래도 모임 만들기를 좋아해서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는 책 모임과 드로잉 모임, 독일에서 석사를 할 때는 비건, 제로 웨이스트, 드로잉 모임 등을 했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어쩌다 보니 온라인으로 각종 스터디와 책 모임, 연구모임을 하게 되었다.
어떤 모임들과 프로젝트를 했을까?
2019년 여름, 석사와 박사 사이에 한국에 몇 달 있었는데, 떠나기 직전에 기후변화 청년모임인 빅웨이브를 알게 되었다. '청년'에 나이 제한을 두진 않지만 주로 20-30대인 사람들 백여 명 정도가 느슨한 네트워크를 이루어서 채팅방에서 정보도 공유하고 달마다 기후변화 관련한 행사를 하거나 여러 스터디들이 있는 모임이었다. 뒤늦게 알게 되어서 스터디에 참여도 못하고, 스터디들이 다 오프라인이라 참여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워서 프랑스에 가면 온라인 스터디를 만들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10월에 프랑스에 와서 자리 좀 잡고 스터디를 오픈하려는 2020년 3월, 마침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어 온라인 모임이 대세가 되어 버렸기에 스터디원 모집도 수월했다.
박사과정을 막 시작한 때인 만큼 관련 주제에 대해서 많이 읽어야 하는데 같이 읽으면 재밌겠다 싶어서 아티클 읽기 모임을 했다. 꼭 학술논문만은 아니고, 기후변화와 환경문제 전반에 대한 시류를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주로 기사를 읽는 모임을 했었다. 첫 시즌에는 내가 읽고 싶었던 기후변화/환경 관련 (영문) 기사나 간단한 논문을 고르고 커리큘럼을 짜서 사람들과 같이 읽고, 그다음에는 스터디원들이 주제와 기사를 골라서 같이 읽기도 했는데 아티클에서 다양한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참여자들 각자의 전공이나 배경을 통해 배우는 것도 많아서 즐거웠다.
그 이후엔 IPCC 보고서 읽기 모임이나 그린 뉴딜 스터디 등, 나도 궁금해서 공부해 보고 싶은데 혼자서 하기는 힘들거나 재미없는 것들을 계속 스터디로 만들어서 하게 되었다. 그러다 빅웨이브 여러 멤버들과 안면이 생기고, 어떤 사람들이 활동하는지도 궁금해지고, 같이 이것저것 기획도 하게 되어서 다른 분들의 프로젝트 기획을 돕기도 하고 참여도 하고 (환경 다큐멘터리 보기 모임과 책 모임들이 정말 재밌었다!) 대학원 관련 세미나도 여럿이서 같이 기획하고, 기후 운동 내 젠더 관련한 세미나나 멤버들 인터뷰 프로젝트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그린 뉴딜 스터디에서 시작된 연속적인 모임들이었다. 스터디원들의 공통 관심사와 문제의식으로 인해서 그다음 해(2021)에는 그린워싱 연구회가 만들어지고, 연구비 지원 펀딩도 받아서 보고서까지 내게 되었다. 이어서 그 멤버들과 (1-3명의 변동은 있었지만) 2022년에는 ESG 연구회, 2023년에는 기후변화 커뮤니케이션 연구회, 그리고 스핀 오프로 2023년 상반기의 ESG 실무 관련 연구로까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연구의 일환으로 설문과 인터뷰들도 진행했었는데 그런 질적 연구 방법들도 내 연구에서는 다루지 않는 부분이었는데 정말 흥미롭고 재밌었다.
2년 차까지 빅웨이브에서 기획했던 활동들. 2022-2023년에는 기존 모임분들이나 연구 네트워크에서 모임을 지속했다
어느 순간에는 어 박사 연구도 좀 더 열심히 해서 졸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딴짓(?)을 많이 해도 되나? 아니, 딴짓만 해도 되나? 해서 빅웨이브와 다른 온라인 연구 커뮤니티를 통해서 글쓰기 모임들과 초록 읽기 모임들을 (여러 개) 만들었다. 특히 박사과정 초기에 '시나리오'라는 나에게도 지도교수에게도 새로운 주제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인터넷을 뒤지다 트위터에서 발견한 Anticipatory Governance 온라인 슬랙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과 꾸준히 아카데믹 글쓰기 모임을 해 왔는데 (이 책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함) 그게 큰 도움이 되어왔다. 일단 모였을 때는 글을 쓰고, 피드백도 받으니까. 게다가 서로서로 체크인하면서 심적 지지도 되는? 그래서 그런 비슷한 모임들을 몇 개 더 만들었고 막판에는 다른 분이 하는 비슷한 논문 쓰기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혼자서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인간인가 싶기는 하지만 같이 하면 더 잘 되는 걸 어떡해! 암튼 그래서 같이 글쓰기나 논문 읽기를 꾸준히 같이 하기도 하고, 거기서 또 사이드 프로젝트로 연구 프로젝트가 탄생하기도 하고, 온라인 콘퍼런스도 기획하고.. 배보다 배꼽이 커졌나 싶은 순간들도 있기는 했다. 그래서 박사 1-2년 차 때에는 그 주에 한 일을 정리하다 보면 박사 연구에 쓴 시간보다 다른 스터디와 연구 모임 관련 활동에 쓴 시간들이 더 많기도 했는데.. 3년 차가 되니까 박사 논문 마무리에 좀 더 집중하자!라는 마음으로 논문 글쓰기 모임 하나, 연구 모임 두 개, 책 모임 하나로 다운사이징을 하게 되었다는.
이런 모임과 프로젝트들이 어떻게 도움이 되었을까?
박사과정은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혼자 오랫동안 다루는 일인데, 혼자 하는 일보다는 같이 하는 일이,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하기보단 다양한 주제를 하고 싶고, 일의 결과물과 피드백도 좀 더 자주 받고 싶은 나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연구에 꽤나 자율성이 있을 것 같지만 지도 교수와 펀딩을 받는 프로젝트의 제한 안에서 해야 되다 보니 자율성도 생각보다 적고.. 그러다 보니 내가 관심 있는 주제를 정해서 자율적으로, 팀으로, 여러 주제를 다루고, 결과물을 좀 더 빨리 낼 수 있던 사이드 프로젝트가 즐겁기도 하고, 지적으로도 자극이 되어서 나의 숨구멍이 되어 주었던 것 같다. 특히나 박사과정 + 코로나의 조합으로 고립되기 딱 좋았던 상황이었는데 이런 모임들 덕분에 좀 더 사람들과 세상과 연결되고, 내가 하는 일의 효용성도 느끼고.. 어떻게 보면 지난 3-4년간 나의 정신건강을 크게 지켜주고,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 준 건 이런 모임들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학계로 나가지 않고 취직을 한 나에게는 이 경험들이 엄청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이런 모임과 프로젝트들을 통해 기획을 하고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피플 매니징 경험까지 하게 된 것이 내가 오퍼를 받은 포지션들에서 다 엄청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면접 과정에서 이에 관련한 질문들도 많았고 시간관리나 인간관계, 리더십 관련 질문들에 대답할 때 예시로 박사과정 연구보다 거의 사이드 프로젝트 사례들을 들기도 했다. 아무래도 혼자 하는 박사과정 연구보다는 팀으로 하는 이런 프로젝트가 회사에서 하는 일과 더 접점이 커서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생각해 보니 사이드 프로젝트 얘기를 별로 할 기회가 없던 면접들도 있었는데 이런 포지션들은 연구소들이었고 아무래도 나의 사이드 프로젝트보다는 논문을 몇 개 썼는지, 연구에서 어떤 방법론 썼는지 물어보고 2차 면접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역시 나는 연구보다는 기획이나 프로젝트 매니징 쪽 일이 잘 맞는가 싶기도 하다. 지금 하는 일도 지원할 땐 컨설턴트였는데 결국 포지션은 컨설턴트 겸 프로젝트 매니저로 되었고 일이 꽤나 잘 맞고 즐겁다.
미래를 생각하고 한 일은 아니고 어떻게 보면 박사과정 중에, 그 순간에 내가 즐겁자고, 살아남자고 시작한 모임들인데 안 하고 박사만 했으면 취직도 못했겠는데 싶다. 그리고 또 내가 이렇게 같이 팀으로 일을 하고 사이클이 좀 더 짧고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좋아하고 잘 맞는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어서 나에게 맞는 일을 찾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고.
모임들이 Do something you're good at, keep in touch, ask for help, talk about your feelings, take a break, care for others를 다 충족시켜 준 것 같달까 (Bono Kim의 엽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든 이런 모임들이 있었다는 게 무엇보다 삶을 한층 즐겁고 풍요롭게 해 준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다는 것, 그리고 뭔갈 같이 만들어나간다는 것. 코로나와 박사과정 중 나의 정신건강을 다잡아 준 것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사람들인 것 같다. 매주 꾸준히 보고, 스터디만 하는 게 아니라 근황도 나누고, 서로의 고민도 들어주고.. 연구실 친구들도 좋았지만, 코로나 락다운 중에 몇 달간 못 보기도 했고, 의외로 기후 위기와 사회적 위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4-5명 중에 한 명 밖에 없기도 하고 해서 좀 실망스럽기도 했달까. 그렇기에 이런 사이드 모임과 프로젝트에서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공부하고, 서로 고민을 나누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는데 뭔가를 같이 만들어나간다는 것도 즐겁고 뿌듯하고 보람찼다. 박사과정에서 헤맬 때 효능감을 느끼게 해 줬달까.
지나고 보니, 박사과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서포트 네트워크라고 생각한다. 친구나 가족 연인 등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그런 네트워크가 있으면 좋지만 (그래서 박사과정을 위해 아는 사람이 없는 새로운 지역으로 가면 더욱더 힘든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럼 연구실 사람들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서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을 찾는 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서포트 네트워크를 물리적으로 툴루즈에서보다는 온라인에서, 한국에 있거나 유럽 다른 도시나 북미에 있는, 멀리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관심사가 더 비슷한 하는 사람들로 채웠던 것 같다.
사이드 프로젝트에서 얻은 거라면 박사과정에서 얻은 게 아니지 않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박사과정이 아닌 평범한 직장을 다녔다면 이렇게 시간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을 테고. 또 이렇게 박사과정에서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찾아서 발굴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도 모임을 하고 거기서 얻은 게 많긴 했으니까 여기서 직장을 다녔더라도 모임은 했을 것 같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많은 분야를 적극적으로 하진 않았을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