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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그릿 Jul 23. 2021

빡쳐도 다시 한번

화가 난다 화가 나

며칠 전 도로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좁은 길에서 큰 도로로 우회전해 나와서 얼마 안 가 있는 좌회전 차선까지 3개 차선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길 반대편 적색 신호등이 켜진 틈을 타 날렵하게 차선을 옮겨야 했다. 20년 운전 경력을 뽐내며 가볍게 차선을 넘어가던 중, 날카롭고 긴 경적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우회전 차량을 간과했다. 차량은 아니었고 125cc 스쿠터였다. 복색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20대 청년으로 보였다. 시속 3km/h 미만이었으니 딱히 위협적인 상황은 아니었을 거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얼른 비상깜빡이를 켰다. 근데 사건은 여기서 벌어졌다. 스쿠터에 탄 녀석(아직 뒤끝이 남았다)이 왼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내 차 오른편으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순간 입 모양이 쌍시옷을 그렸다. 애들이 뒷자리에 타고 있어서 '우리 아빠는 운전대만 잡으면 괴물로 변해요' 소리 안 들으려고 혓바닥으로 목구녕을 꾹꾹 눌렀다. 다행히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육두문자를 겨우겨우 틀어삼켰다.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데도 어찌어찌 성공했다. 그래, 참 화가 많은 세상이지, 하며.



그래, 맞지. 화가 많은 세상.

살맛은 안 나고 화맛만 나는 세상이다.

화가 난다 화가 나.



화가 난다 화가 나



계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발레학원 운영하는 아내도 계속 울상이다. 대체 왜 우리한테만 이러냐고. 아내 수입에 타격이 생기니 월급 외 돈 벌 짱구를 굴려본다. 급여날 제일 우울한 쥐꼬리 월급 회사원이 생각할 법한 가외 소득, 뭐 별 거 있나. 뻔한 게 재테크다. 자산 시장으로 눈을 돌려보면 이 화가 좀 가라앉을까.



부동산 시장 인기 없던 시절(이 실제로 있었는지 상상이 안 될 지경이지만), 엉겁결에 청약 당첨돼서 매달 원리금 치르기 빠듯했던 친구는 몇 년 새 보유 자산이 수억 늘었다. 근데 곧 집값 떨어진다는 뜬소문에 일말의 의심을 품지 못하고 전세로 신접살림을 차렸던 난 영락없는 벼락거지 신세다.



주식시장은 어떨까. 작년 3월 반등 후 대상승장에 회사 동료는 주식으로 몇 배를 불렸대서 솔깃해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는 건 재미없는 횡보장이다. 예전 박스피 시절로 돌아왔댄다. 삼천피 천스닥 연초부터 들었는데 반년이 지난 지금도 거기서 거기다.



친구의 친구는 코인으로 몇 달만에 수십억 자산가가 됐다는 말에 혹했다. 비트랑 이더를 조금 담았더니 '그동안 성원에 감사드립니다.'라며 시즌2 종료랜다. 내 주변은 다 잘 되는(것처럼 보이는)데 계속 똥볼만 차고 있으니, 화가 난다. 화 날 수밖에 없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별로 없고 상대적 박탈감만 늘어간다.






자기계발 담론을 끌어와 보자. 개인의 수신제가 측면을 강조한다. 화는 다스려야 할 악이다. 비교는 금물이다. 남들과의 비교는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 둘 중 하나다. 개인에게 이로울 게 없단다. 화는 제거하고 비교는 어제의 나 자신과만 하면 된단다.



와닿을 리, 없지 않은가. 화나는 것도 다 내 탓이란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흡사 종교와 비슷한 모양새다. 물론 개인 탓도 없을 수 없겠지만, 사회 시스템 한구석에 균열이 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정상적인 상황으로 만은 볼 수 없는 현실이다. 근데 뭐 되새겨보면 화 날 것 투성이지만, 어차피 화낸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긴 하다.



마냥 화만 내고 있기도 겸연쩍다. 화는 결국 돌고 도니까. 손가락 욕 날린 스쿠터 그 녀석도 분명 뭔가 화가 잔뜩 쌓여있었을 거다. 마냥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내 잘못이 분명 먼저니까. 그래도 여전히 뒤끝을 좀 부리자면 애들도 타 있는데 뻐큐는 좀 심하긴 했다.



다시 한번 자기계발 담론을 갖고 와 본다. '긍정의 힘' 일색이다. 긍정 확언, 할 수 있다. 한계를 깨라, 저슽두잇 등등등. 다 듣기 좋은 소리다. 내가 못해서 문제지. 좋은 걸 못 따라하니 또 한 차례 열등감에 휩싸인다. 잘 살아보겠다고 자기계발 시작하면 또 잘못 사는 느낌만 잔뜩 들게 만든다. 이거 정상이야?



다 족구하라 그래



긍정의 힘 못지않게 부정도 힘이 세다. 최소한 긍정의 힘 못해서 가뜩이나 만땅인 열등감에 +1 할 일은 없으니 좀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대한민국 다 족구하라 그래!' 샤우팅 할 에너지도, 방향만 잘 틀어주면 좋은 촉매제가 될 수 있다. 흔히들 입에 달고 사는 'ㅈ같아서 하고 만다 내가' 하는 ㅆ마이웨이 마인드셋.



머리끝까지 화 날 일 투성이지만, 수승화강이다. 머잖은 불혹, 건강을 위해서라도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길바닥에서 뻐큐를 먹더라도 화 내면 결국 나만 손해다. 복싱에서도 상대의 주먹을 흘리는 게 기술이다. 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받아줄 맷집이 부족하다면, 스리슬쩍 방향을 틀어 흘려줘야 한다. 화도 피할 수 없다면 받아주든지 흘려줘야 한다. 난 맷집 약하니까 흘려주는 걸로.



부정은 힘이 세다. 화한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화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열등감은 나쁘지 않은 동기부여가 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추진력을 준다. 화 나는 세상이지만, 일단은 아빠니까. 주저앉아서 세상 다 족구하라고만 할 수는 없다. 투덜이로만 살아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빡쳐도 다시 한번.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그래도 아직 뒤끝은 남는다.

잊지 않을 거야 스쿠터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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