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자유를 중심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 겉핥기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1990)(감독: 피터 위어, 출연: 로빈 윌리엄스, 로버트 숀 레오나드, 에단 호크 외)
* 이 글에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숲으로 갔네, 나 스스로 살고 싶어서. 삶의 골수를 빨아들이고 삶 깊숙이 살기 위해, 삶이 아닌 그 모든 것을 물리치기 위해, 내 끝을 맞이했을 때 내 삶이 아님을 깨닫지 않길….(Henry David Thoreau, 1817-1862)”
이 시는 웰튼 아카데미의 문학 교사로 부임한 키팅(로빈 윌리암스 분)이 자신의 수업 중 학생들에게 읽어 준 시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를 보여주는 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키팅의 수업에 영감을 받은 그의 학생들은 이 시의 내용처럼 숲으로 나아가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영화를 접한 수많은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해 준 명작, 죽은 시인의 사회는 우리에게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저 역시 교사로서 이 영화를 보며 교육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특히 윤리 교사로서 이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철학적 사조를 생각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교사는 어떤 교육적 철학으로 학생들을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통과 자유의 대비
이 영화는 두 가지 가치의 대비를 통해 감독 혹은 각본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드러냅니다. ‘전통’과 ‘자유’가 그것인데요. 영화는 웰튼 아카데미의 네 가지 전통을 나타내는 깃발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자기 삶의 방관자에서 실존적 삶을 다짐하게 된 토드(에단 호크 분)가 관객을 바라보는 씬으로 마무리됩니다. 이처럼, 이 영화는 비판하고자 하는 '전통'을 극의 처음에, 추구하고자 하는 '자유'를 극의 마지막에 배치하여 두 가치의 선명한 대비를 보입니다.
특히 영화에서 전통은,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이 가치 있게 지켜온 무언가라기보다는, 구태의연하고 개인의 자유를 얽매는 장치로 이해됩니다. 이와 같은 영화의 시선은 군악대 느낌의 음악, 각지게 줄 서 있는 학생들, 규율로 학생들을 엄하게 지도하는 교사 등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어떤 표현도 하지 않던 학생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없어지자 학교의 전통들을 익살, 공포, 타락, 배설로 표현하는 장면에서 전통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 역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을 나타내는 장치들이 나열된 교실 한가운데에 문학교사 키팅이 난입합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딱딱한 교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더니, 학생들을 교실 밖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선배들의 사진과 트로피가 있는 곳으로 학생들을 불러 모으고는, 과거 선배들의 삶이 사라졌음을, 그리고 현재는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번역하자면 ‘오늘을 즐겨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삶은 이 선배들과 같이 과거가 될 것이니,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학생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전통과 자유는 영화 내 여러 상징으로 드러납니다. 가장 큰 대비는 바로 학교 건물과 자연경관입니다. 웰튼 아카데미는 숲과 호수를 낀 넓은 교정을 지닌 학교인데요. 기존의 전통과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은 주로 각진 학교 건물을 배경으로 서 있고, 자유라는 가치를 따라가는 인물들은 호수 혹은 나무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닐(로버트 숀 레오나드 분)이 키팅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 질문할 때, 키팅은 넓은 호수와 그 뒤의 숲을 배경으로, 전방으로 쏟아지는 역광을 받으며 질문에 대해 대답합니다. 반면 닐을 비롯한 학생들은 학교 건물과 그 주위 앙상한 나뭇가지를 배경으로 키팅의 대답을 듣습니다. 질의를 마친 키팅은 마치 자유를 향해 나아가듯, 호수를 향해 천천히 걸어갑니다. 이 구도는 닐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토드가 절규하며 얼어붙은 호수를 향해 나아갈 때에도 반복되는데요. 토드는 키팅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은 닐이나 찰리와는 달리 관찰자의 입장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판단을 유보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키팅과 마찬가지로 호수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그 인물이 어떤 성장을 이루었는지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자연경관 외에도 특히 학생들이 자유를 향해 나아갈 때마다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새의 형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화 초반, 학교 종이 울리자(시간을 알려주는 종소리는 규율과 규칙을 상징) 새들은 어지럽게 날아갑니다. 이후 닐의 주도로 학생들이 학교를 빠져나가 죽은 시인의 사회 모임을 하러 가는 장면에서, 학생들은 학교 벽면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 안개에 싸인 어두운 광야를 향해 나아갑니다.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학생들의 모습 뒤로 부엉이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윽고 나무로 된 터널을 지날 때 놀란 새들이 날아올라 안갯속으로 사라집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투영하기라도 한 듯 말이죠. 그리고 댄버리를 짝사랑한 녹스가 자전거를 타고 댄버리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도 역시 새들은 하늘을, 혹은 자유를 향해 날아갑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자유의 본질인가?
전통과 자유의 대비를 통해 자유를 강조하고자 했던 영화는, ‘자유’의 본질을 무엇으로 규정하고 있을까요?
녹스(조쉬 찰스 분)는 저녁 식사를 위해 초대받은 집에서 크리스(알렉산드라 파워스 분)를 발견하고 한눈에 반합니다. 남자 친구가 있던 크리스에게 접근하고,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읊고, 연극에 함께 가자며 초대하는 그의 행동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 속한 친구들의 지지로부터 용기를 얻은 행동으로 보입니다. 그 와중에 크리스가 주최하는 파티에 초대받은 녹스는 그곳에서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향락에 빠진 광경을 목격합니다. 이윽고 술에 취한 그는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남자 친구가 있던 크리스에게 키스를 하고 맙니다. 그 일로 인해 크리스의 남자 친구인 채트의 주먹에 맞은 녹스의 입에서는 파티 장의 조명 빛과 같은 붉은빛의 피가 흐릅니다. 이때의 붉은색은 아마도 녹스가 지닌 욕망과 그 욕망의 결과를 나타내는 색으로 보입니다. 녹스가 생각한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그녀, 크리스와 함께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찰리(게일 핸슨 분)는 부잣집 아들로, 키팅의 메시지를 일차원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보이는 익살스러운 장난들은 결국 도를 지나쳤고, 그로 인해 죽은 시인의 사회가 발각되는 결과가 초래됩니다. 그에게 있어 자유란, 성찰 없이 즉석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른바 ‘방임으로서의 자유’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반면 닐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원래 맡기로 했었던 교지의 부편집장을 그만둬야 했고, 좋은 성적을 받아 의대에 진학해야 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의 욕망은 철저하게 무시되었습니다. 닐이 정말로 바랐던 것은 연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전에 연기에 대한 경험이 있었는지는 영화상에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가 연극에서 주요 배역을 얻은 걸로 보아서는 연기 경력이 있었거나 혹은 연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닐에게 있어 자유란, 아버지의 강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연기를 하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녹스, 찰리, 닐이 생각한 자유는, 말 그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에 있어 간섭이 없는, 소극적 자유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1909-1997)은 자유를 크게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합니다. 소극적 자유란, 앞서 언급했듯 간섭의 부재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면, 적극적 자유는 자신이 자신을 통제하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로서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자기 지배를 의미합니다. 자유주의자로서 벌린은, 적극적 자유가 다수의 폭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합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그들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예시를 들면서 말이죠.
키팅이 자신의 수업에서 가장 처음 제시한 단어가 바로 카르페 디엠인데요. 카르페 디엠을 설명하며 키팅은 인생은 짧기 때문에 현재를 즐기라고 가르칩니다. 즉 그가 학생들에게 제시한 자유는 간섭이 부재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즉 소극적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극적 자유를 진정한 자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은 즉 욕구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자유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인간은 욕구에 따라서만 사는 삶, 즉 욕구의 노예가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자유롭지만 역설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죠. 또한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합니다. 그러나 소극적 자유를 지나치게 추구하다 보면 사회적 의무나 책임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극적 자유를 주장한다는 것은 사적인 삶을 공적인 삶보다 중시한다는 것이고, 개인의 욕구 충족이 공적인 삶의 의무보다 우선시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요. 바로 이기심과 정치적 무관심입니다.
칸트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욕구 즉 자연적 경향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율’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했듯 욕구에 따르는 삶은 사실상 우리가 욕구의 노예가 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삶은 욕구의 명령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을 정치적으로 확대한 것이 페팃(Philip Noel Pettit, 1945-)이 주장한 비지배로서의 자유입니다. 비지배로서의 자유는 권력을 가진 자의 자의적인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공동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정치 참여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권력자의 독재를 막고 시민들이 자기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죠. 비지배로서의 자유는 간섭으로부터의 자유가 자칫 노예의 자유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관대한 주인이 노예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노예는 간섭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전통에 따르는 교사들의 자세
영화 상에서 키팅을 제외한 웰튼 아카데미의 교사들은 이른바 웰튼 아카데미의 전통에 따르는 교사들입니다. 그들은 규율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지키는 것이 학생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규정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을 경우 강하게 체벌합니다. 찰리가 자유분방한 행동을 공개적으로 했을 때, 교장이 그에게 신체적인 체벌을 가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 교사들, 특히 교장은 키팅의 수업 방식을 못마땅해합니다. 기존의 전통과 질서, 규율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장은 딱딱한 교정 내부에서 창살이 가득한 창을 통해 키팅의 수업을 내려다봅니다. 이때의 창살은 교장의 인식 틀 혹은 선입견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키팅은 그 창살의 프레임 밖으로 학생들을 이끌고 나갑니다. 교장은 이 모습을 창살을 통해 바라보며, 키팅의 이와 같은 수업이 자신의 인식의 틀을 넘어선, 전통에 반하는 위험한 행동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학생을 미성숙한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이 교사들에게 있어 학생은 가르쳐야 하는 대상이며, 그들에게는 자유를 알려주는 것보다는 규율을 체득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생각에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미성숙한 학생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그 자유는 방종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자유를 따르라는 키팅의 자세
이 영화의 주요한 등장인물인 키팅은 영화 속에서 익명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의 사생활은 베일에 가려져 있고, 그의 모습은 거의 수업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즉, 관객은 키팅을 그의 수업 혹은 업무시간에만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관객들은 키팅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어렵습니다. 영화는 키팅을 한 인물로 보기보다, 영화에서 중시하는 교육적 가치를 사람의 형상으로 드러낸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이때의 교육적 가치는 ‘자유’인 것 같습니다.
전통에 학생들을 맞추고자 하는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키팅은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 수업으로 제시한 개념은 카르페 디엠입니다. 다음 수업에서는 시를 계량화하여 그 가치를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내용의 페이지를 찢으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또 다른 수업에서는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면서 학생들에게 교탁 위로 올라올 것을 제안합니다. 그다음 자작시 숙제를 발표하는 수업에서는 수업에 소극적이었던 토드에게 야성을 깨우라 일침 하며 자신만의 시를 써볼 것을 강조합니다. 이 외에도 야외에서 규율로부터 벗어날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시구를 외치며 공을 차는 수업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이때의 키팅이 추구하는 바는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만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실존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존주의는 기존의 보편적인 틀로 개인을 규정할 수 없으며,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유를 통해 그 자신을 선택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키팅의 생각은 완전히 옳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전통과 자유 사이에서
영화에서는 전통은 자유를 억압하는 폐단으로, 자유는 가장 숭고한 가치로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전통이란, 오랜 역사를 거쳐 형성된 공동체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공동체에 속한 존재임과 동시에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역사가 담긴 전통을 마냥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고, 또한 불완전한 개인이 그동안 이어져 온 전통을 마냥 비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는 것이 학교의 목적이라고 말하며, 체벌 등을 통해 학생을 통제하는 웰튼 아카데미의 소위 전통이라는 것이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반면, 키팅이 제시하는 소극적 자유 역시 앞서 제시한 여러 이유들로 인해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통과 자유 사이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저는 전통이 지닌 순기능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의 역사적 전통에 문제가 있다고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자아의 뿌리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전통을 무작정 비판하고 무시하기보다는, 전통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전통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전통과 관련된 당사자가 모두 참여하여 자율적으로 전통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유에 대해서도, 무분별한 자유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적절히 절제하는, 이른바 자율로서의 자유의 측면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키팅의 수업의 긍정적인 측면
현직 교사의 입장에서 키팅이 제시하는 수업은 내용과 방법 모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가 학생들에게 처음으로 제시한 카르페 디엠이라는 메시지는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개념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갑니다. 따라서 사회 혹은 가족의 강요에 따르는 수동적인 삶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직접 찾고 스스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가르침은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키팅은 다양한 수업 방식을 활용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개념을 학생들에게 교육합니다. 특히 기존의 전통이 지닌 불합리한 부분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야외 수업, 내면의 야성을 일깨우는 열정적인 작시 수업 등은 자유에 대한 교사의 열정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훌륭한 모델링의 사례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학생들을 교탁에 올라서도록 한 수업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수업 방식이라 볼 수는 없지만, 그 행위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영화는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키팅이 교탁에 올라섰을 때 로우 앵글(Low camera angle, 카메라가 피사체보다 낮은 데 위치해서 화면에서는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느낌을 주는 앵글)로, 학생들은 하이 앵글(High camera angle, 카메라가 피사체보다 높은 데 위치해서 화면에서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느낌을 주는 앵글)로 잡아 교사와 학생 사이의 상하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후 학생들이 교탁에 올라서게 했을 때 학생들은 로우 앵글로, 키팅은 하이 앵글로 잡아 교사와 학생이 지녔던 기존의 관계를 역전시킵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였고, 동시에 전통적 상하관계에서 벗어나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습은 극의 마지막에서 반복됩니다. 학교를 떠나는 키팅을 향해, 실존적 삶을 선택하게 된 토드가 책상 위로 올라서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칠 때, 그의 모습은 로우 앵글로 잡힙니다. 그가 앞으로 자신만의 삶을 선택할 것이라는 암시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것은 키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관객을 향해 있습니다. 관객 역시 자신의 실존적 삶에 대해 고민해 보라는 듯이 말입니다.
또한 학생들을 대하는 진실된 태도 역시 교사로서 본받을 만한 점이라 생각됩니다. 그의 문학 수업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됩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수업과는 관계없는 발언 등을 통해 수업의 진행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이때 키팅은 수업과 관련 없는 의견에 대해 참여해 주어 고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은 교사의 태도는 학생들을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태도는, 닐과 대화하는 아버지와 키팅의 모습을 비교하는 연출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극 중 닐은 아버지 몰래 배역을 따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닐의 선택에 반대합니다. 닐의 아버지는 닐의 방에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닐이 자신을 속인 것, 그리고 연극 따위로 시간을 낭비한 것에 대해 분개합니다. 이때 닐과 아버지는 서로 다른 공간에 서 있는데요. 닐은 문을 등지고 문가에 서 있으면서 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합니다. 그리고 닐의 아버지는 방 안에서 창을 등지고 서 있습니다. 영화 상에서 닐은 창밖을 바라보며 연극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때의 창밖은 닐의 자유를 상징합니다. 창을 등진 아버지는 닐의 자유를 가로막는 존재인 것으로 보입니다. 닐과 아버지가 대화하는 씬을 보면, 닐의 얼굴과 아버지의 얼굴이 교차편집 됩니다. 한 컷 안에서, 닐이 이야기를 할 때 이를 듣는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고, 반대로 아버지가 이야기할 때 닐의 얼굴은 비추지 않습니다. 즉 둘은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의견만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다음 씬에서 이 문제에 대해 키팅과 상담하러 간 닐은, 아버지와의 대화 때와는 달리 키팅의 방으로 스스럼없이 들어갑니다. 또한 닐과 키팅이 대화할 때, 그 둘은 동일한 프레임 안에 위치합니다. 이는 키팅과 닐이 진정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출이라 생각합니다. 닐은 연극이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것이며, 아버지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학생이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교사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학생들에게 열정적이고 솔직하게 다가가는 키팅의 자세는 교육자로서 필요한 자세라 생각합니다.
키팅의 수업에서 아쉬운 점
그러나 저는 키팅의 수업이 마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일단 키팅이 추구하는 실존적 자유라는 가치는 반쪽짜리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크든 작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추상적 자아로서의 개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무한한 자유 앞에 홀로 선 단독자를 강조합니다. 이와 같이 공동체의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자유는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소외시키며 공동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공동체의 전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개인의 정체성을 부정할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대비되는 극단적인 가치들의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자유는 앞서 소개한 공화주의의 자유, 즉 비지배로서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개인의 권리만을 주장해서는 안되며, 나라는 존재가 공동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존재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입니다. 비지배로서의 자유는 공동선 혹은 주변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실천에 근거한 자유만을 진정한 의미의 자유라고 규정합니다.
또한 키팅은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에 대처하는 어떤 방법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영화 상에서는 이것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현실과 이상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만약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과 지나치게 충돌할 경우 이상에 대한 집착을 잠시 내려놓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으니까요. 물론 이상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상을 꿈꿀 때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이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 이른바 개인의 꿈이 될 수 있는데요. 그 꿈을 이루는 것만이 행복의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닐의 상황을 되짚어 봅시다. 닐의 아버지는 닐을 사랑합니다. 다만, 그는 닐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나 완고하다면, 타협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길고, 닐이 연기를 하겠다는 마음이 크다면 대학 진학 이후에, 혹은 직장을 얻은 이후에라도 취미 활동이나 이직을 통해 연기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완고한 마음이 누그러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닐의 극단적인 선택이 키팅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와 같은 선택은 아버지의 극단적인 강요와 그에 따른 도피로서 본인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죠. 다만, 이상을 추구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현실을 상기해 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의 수업은?
키팅의 수업에서 아쉬운 점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실 그가 지닌 교사로서의 태도는 많은 교육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먼저, 영화가 개봉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학생들을 인격체로서 존중하고자 하는 태도는 영화 개봉 후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키팅의 수업에서 비판받을 만하다고 이야기한 부분들은 사실상 당시에 진리라고 여겨졌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 맥이 닿아 있습니다.
30년 전 키팅의 수업을 보며 현재 10년 차 교사로서의 저의 수업을 돌아보았습니다. 고등학교 교사로서 대입을 무시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고, 학생들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강의식 수업을 진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과의 소통이나 라포의 형성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중요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학생들은 그 이야기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중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에만 안주한다면, 웰튼 아카데미의 다른 교사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새롭게 맞이할 2학기에는 조금 더 학생들의 성장과 행복에 기여하는 수업을 준비해 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