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와 칼포퍼의 이론을 중심으로 쇼생크 탈출 겉핥기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1994)(감독: 프랭크 다라본트, 출연: 팀 로빈스, 모건 프리먼 외)
* 이 글에는 쇼생크 탈출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쇼생크 탈출은 수년간 IMDb(Internet Movie Database)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꽤 인상 깊게 본 영화였습니다. 성공한 은행가인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 분)이 억울하게 쇼생크라 불리는 교도소에 가게 된 후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제목이 스포일러 하듯 그 교도소를 탈출하는 내용으로 이뤄진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자유와 희망에 관한 영감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쇼생크를 인간을 좌절하게 하는 현실로, 그리고 그 쇼생크의 벽을 일종의 고정관념으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을 장자로부터 찾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지금의 나(혹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를 고정관념에 빠지게 한 현실과 그 현실로부터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방안을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 개념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고정관념(Stereotype)이란,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과잉 일반화 또는 부정확하게 일반화된 신념을 의미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며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쇼생크라는 현실에 맞게 만들어낸 각자 자신의 고정관념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 중 교도소 도서관을 운영하는 수감자인 브룩스(제임스 휘트모어 분)는 자신이 만든 고정관념에 스스로 갇힌 인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씬이 있습니다. 앤디는 브룩스와 함께 교도소 내 도서관을 운영하게 되는데요. 도서관은 방 안의 방 속 깊이 위치해 있습니다. 해당 씬에서 브룩스는 가장 안쪽 방 도서관에 있고, 앤디는 도서관의 바깥 방에 있습니다. 그 구도에서 또 다른 바깥 방 쪽에서 간수 한 명이 앤디를 찾아옵니다. 이렇게 세 명이 각기 다른 공간에 위치해 있으면서 한 프레임에 들어옵니다. 이 씬에서 각 인물들의 위치를 보면, 브룩스는 교도소 내 도서관이라는 자신의 역할과 자리에 머물러 있는 반면, 앤디는 도서관 바깥을 향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앤디와는 대조적으로 브룩스가 스스로를 쇼생크에 가두고 싶어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역기간이 끝나가는 브룩스는 교도소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비자유에 익숙해진 사람은 자유를 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사회에 나온 그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하기에 이릅니다. 그가 자살하기 전, 카메라는 그의 얼굴 정면을 비추는데요. 그의 얼굴은 천장의 얇은 기둥들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감옥에서 출소했으나 역설적으로 현실이라는 냉혹한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브룩스는 “나는 교도소에 있어야 하는 인간이다”라는 스스로 만든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브룩스 외에도 자신만의 고정관념에 갇힌 여러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앤디의 친구가 되는 레드(모건 프리먼 분)는 쇼생크라는 현실에 순응하며, 희망은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고정관념은 진실이 아닙니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오프닝 씬입니다. 영화의 오프닝은 앤디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진술하는 내내 카메라 정면을 응시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반면 검사와 판사는 그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그를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정면을 응시하던 앤디가 눈을 감으며 오프닝 씬이 마무리됩니다. 고정관념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는 순간입니다.
쇼생크 죄수들은 교도소라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바탕으로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을 형성합니다. 냉혹한 현실에서 발생한 일종의 방어기제이겠지요. 죄수들이 형성한 고정관념은 모두 쇼생크에서 비롯됩니다. 이때 쇼생크는 절대 부서지지 않고, 바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냉혹한 현실을 나타냅니다. 영화 내에서 쇼생크는 벽돌과 철조망으로 된 직선의 이미지로 죄수들을 가두어 놓습니다. 극 중 인물들은 대체로 딱딱하고 차가운 벽돌 혹은 촘촘한 철조망을 배경으로 대화하고, 푸른 하늘 역시 네모난 벽돌에 의해 가려지고 재단됩니다.
그러나 쇼생크가 모든 수감자들에게 고정관념을 주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앤디는 교도소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주관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쇼생크에 들어온 지 몇 년이 지나, 그는 교도소 지붕을 칠하는 일에 차출되었습니다. 작업을 하던 앤디는 간수장인 해들리(클랜시 브라운 분)가 상속세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엿듣고는 간수장에게 다가갑니다. 간수장은 작업을 중단하고 자신에게 온 앤디를 지붕 끝으로 몰고 가며 위협합니다. 이때 카메라는 하이앵글(High Angle)로 둘의 모습을 잡다가 크레인 다운(Crane down)으로 서서히 내려와 아이레벨 숏(Eye Level shot)으로 앤디의 얼굴을 비춘 후, 간수장을 비춥니다. 흔히 아이레벨 숏은 프레임 내의 두 인물이 동등한 관계임을 은유합니다. 이를 통해 앤디와 간수장, 나아가 앤디와 교도소 간수 및 소장과의 관계가 재정의(再定義, Redefinition)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간수와 죄수로서 둘은 일방적인 관계였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앤디는 교도소 내의 각종 재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 간수들과 거의 대등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는 교도소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점진적으로 이뤄갑니다.
이처럼 앤디는 쇼생크라는 주어진 현실과 그로 인해 형성될 수 있는 고정관념에 순응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마침내 교도소 벽이라는 현실을 깨고 탈출에 성공했을 때,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교도소 내의 실세였던 레드(모건 프리먼 분) 역시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화 내에서 레드는 총 세 번의 가석방 심사를 받습니다. 영화 초반에 앤디의 형벌이 선고되는 순간, 카메라는 암전 되었다가, 어떤 장소를 향해 문이 열리는 모습을 비춥니다. 바로 레드의 가석방 심사 위원회가 열리는 장소였는데요. 레드는 그곳에서 잔뜩 긴장한 채로 심사위원들이 듣고 싶어 할 만한 말만 늘어놓습니다. 즉 쇼생크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말들이었습니다. 그는 독백처럼 말을 하고, 그의 말을 듣는 심사위원들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습니다. 마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의 가석방은 부적격 판정을 받습니다. 10년 후 브룩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 맞이한 가석방 심사에서도 그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고, 역시나 부적격 판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10년 뒤, 앤디의 탈출을 목격하고 나서 레드는 가석방 심사위원에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교화되었느냐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그는 이전과는 다르게 솔직하게 대답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지난날의 자신의 행동에 뼈저리게 후회하지만, 교화는 헛소리라며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합니다. 위원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이전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위원들을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위원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깁니다. 그의 말이 그들에게 닿는 데까지 20년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석방 적격 판정을 받습니다. 레드는 그를 몇십 년 간 옭아매던 쇼생크라는 현실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으로부터 탈출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고정관념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상가 중 한 명인 장자(莊子, BC369-BC289)의 이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노자의 도가사상을 계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자와 같이 장자는 도(道)와 일치하는 삶을 살 때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도(道)의 관점에서 사물을 평등하게 바라볼 때 사물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도의 관점과 대비되는 개념이 물(物)의 관점입니다. 물의 관점은 사물의 시선에서 다른 사물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일컫습니다.
물의 관점과 관련된 장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마다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여인들이지만 물고기가 그들을 보면 물속 깊이 숨어버리고, 새가 그들을 보면 높이 날아가 버리며 사슴이 그들을 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버린다. 사람, 물고기, 새, 사슴 이 넷 가운데 어느 것이 천하에 아름다움을 바르게 안단 말인가?”** 이처럼 물의 관점을 지닌 자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에 갇혀 그 고정관념을 기준으로 사물을 평가하고 차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본 사물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물의 본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도의 관점, 즉 더 넓은 차원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제물(濟物)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물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만물[物]이 가지런히 하나임 [齊]’을 밝히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자연 만물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평등하다고 보는 경지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나 혹은 사회를 기준으로 유용한 것,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눕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을 바라볼 경우 사물의 본래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장자는 사물을 개인 혹은 사회의 상대적 기준으로 차별할 때 개인의 고통과 사회적 혼란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가치를 기준으로 차별한다는 것은, 좋은 가치를 지닌 사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유욕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며, 지나친 소유욕은 집착을 낳고 개인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장자가 제시한 ‘제물’이라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쇼생크에 수감되었던 죄수들은 모두 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깁니다. 벽에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그 행위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고정관념이라는 벽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행위라고 이해했습니다. 앤디 역시 그 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려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벽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대신, 그 벽을 허물기로 결정합니다. 즉 주어진 현실을 바꿔보기를 결정한 것입니다.
그가 현실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유명무실한 도서관을 수감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간수들과 소장에게 세금 관련 업무를 무료로 맡아주고, 그 대가로 교도소 내에서의 일정 부분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앤디는 6년간 매주 꾸준히 시청에 편지를 보냅니다. 교도소 내의 도서관을 꾸밀 수 있도록 지원금을 보내달라는 요지의 편지였습니다. 그의 꾸준함에 시청 역시 도서관 재정비 사업을 지원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교도소 내의 현실이 바뀔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앤디는 교도소 내 방송으로 누구의 허락도 없이 “피가로의 결혼”을 트는 행동을 합니다. 교도소 안에서 단 한 번도 음악을 듣지 못했던 수감자들은 갑자기 울려 퍼지는 음악에 하던 일을 멈추고 스피커를 멍하니 바라봅니다. 레드는 내레이션으로 “회색의 공간에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 들어와 벽을 무너뜨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앤디는 자신의 돌발행동으로 2주간 독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 작은 사건으로 수감자들의 현실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앤디가 자식처럼 돌봐주던 토미(길 벨로우즈 분)가 모종의 이유로 사살되자, 앤디는 탈출을 결심합니다. 그는 약 20여 년 동안 감방의 벽을 조금씩 조금씩 긁어내어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꾸준함으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현실이라는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이처럼 점진적으로 현실의 문제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앤디의 모습에서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가 제시한 점진적 사회공학의 개념이 연상되었습니다. 점진적 사회공학은 그가 주장한 열린사회의 정의를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칼 포퍼가 주장한 열린사회란, 전체주의 사회인 닫힌 사회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개인주의 사회이자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점진주의적 사회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린사회는 이 세상을 더 나은 사회로 이끌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점진적 사회공학’을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이때 점진적 사회공학이란, 사회 문제에 대한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한 점진적 개선 과정에서 작용하는 공학을 의미합니다.***
물론 극 중 앤디의 방식은 개인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탈출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현실이 한 이상적인 몽상가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행위라는 점에서 점진적 사회공학과 닿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진적 사회공학이 추구하는 바는 결국 ‘더 나은 세상’이라는 이상 혹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고 자란 이 사회가 소위 말하는 “당연한” 사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사회에 의해 우리의 자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 그리고 제도 등은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과거 왕정이었던 조선이 민주 공화정인 대한민국이 된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독재 국가가 되었던 대한민국이 국민들의 참여로 민주적인 국가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는 단 한순간의 “혁명”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여러 사람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을 자유롭게 제안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변화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고 어둡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희망은 좋은 겁니다.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라는 앤디의 말처럼, 희망이 있다면, 그리고 그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상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이상이 현실이 되길 바랍니다.
*한국교육심리학회. (2000.01.10.). 네이버백과 교육심리학 용어사전 ‘고정관념’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943566&cid=41989&categoryId=41989 >
**장자 「장자-제물론」
**두산백과 – 열린사회와 그 적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2608&cid=40942&categoryId=31433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