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현실, 성찰, 능력주의로 원스어폰어타임인할리우드 겉핥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2019)(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외)
* 이 글에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영화광으로 잘 알려진 쿠엔틴 타란티노의 개인적인 향수가 짙게 깔린 영화처럼 보입니다. 할리우드의 황금기가 막을 내리던 1960년대 말의 미국에는 베트남 전쟁과 이에 대해 저항했던 히피 문화의 등장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변화들이 있었는데요. 그 경계선에서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시대적 분위기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치고는 상당히 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가 그 시절 영화, 그리고 영화 산업을 얼마나 동경하고 그리워하고 있는지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그가 그린 대체 현실과 시뮬라크르, 성찰이 결여된 사상의 위험성, 그리고 능력주의가 지닌 이면 등을 생각해 보았고, 이를 중심으로 글을 써 보고자 합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실화의 결말과 다릅니다. 따라서 영화 속 현실은 실화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은, 이른바 대체 현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체 현실이란, 현실 세계에 대한 불만이나 절망에서 비롯되어 문학 작품 속에 드러나는 허구와 상상의 세계로 정의됩니다. 아마도 이 영화는 잔혹한 결말을 맞이한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에 대한 쿠엔틴 타란티노 나름의 애도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폴란스키가 살인사건: 1969.08.09.,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집에 쳐들어가 그의 아내(샤론 폴란스키)와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영화입니다. 영화라는 매체는 현실에 대한 복제품, 즉 시뮬라크르(Simulacre)입니다. 시뮬라크르란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복제물을 뜻하는 개념입니다. 이 영화는 그 스스로가 현실에 대한 대체 현실이면서 시뮬라크르인 동시에 영화(TV 시리즈)라는 시뮬라크르를 제작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의 전성기 시절, 가상의 TV 드라마 바운티 로(Bounty Law)의 예고편으로 시작합니다. 바운티 로는 1960년대에 제작되었던 할리우드식 서부극의 복제품, 즉 시뮬라크르입니다. 즉 이 영화는 시뮬라크르 속 시뮬라크르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실제로는 잔혹하게 살해된 샤론 폴란스키가 살아 있는 대체 현실을 하이 앵글숏으로 담으며 마무리함으로써, 이 영화의 사건 자체가 대체 현실이자 현실과는 독자적인 특성을 지니는 시뮬라크르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영화는 초반부터 실제로는 불운한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샤론 폴란스키(마고 로비 분)를 최대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녀는 시종일관 밝은 색상의 옷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과 즐겁게 소통합니다. 그녀는 할리우드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게 됩니다. 그녀가 연기한 영화 속 배역은 실제 인물을 복제한 시뮬라크르입니다. 그런 시뮬라크르가 된 자신의 연기 모습을 바라보는 샤론 역시 마고 로비와 샤론의 시뮬라크르입니다. 저는 이와 같이 복합적인 레이어들로 여러 겹의 시뮬라크르를 표현하면서도 그것이 살아 있는 듯한 생기를 불어넣는 감독의 연출은, 시뮬라크르가 단순히 복제품이 아니라 그 이상의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생각을 영화로 표현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쯤, 감독은 그녀가 희생당한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듯한 묘사를 보입니다. 극 중 영화배우 릭은 피고용인(스턴트 배우)이자 친구인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 분)에게 자신의 집 안테나를 고쳐줄 것을 부탁합니다. 안테나를 고치는 행위는 방해받는 전파를 조정하여 TV가 선명하게 나오게끔 하는 행위입니다. 카메라는 클리프가 안테나를 고치는 모습을 스쳐 지나가며 옆집의 샤론 폴란스키를 자연스럽게 담아냅니다. 저는 클리프가 전파를 바로잡는 그 행위가, 마치 샤론이 희생된 슬픈 역사를 바로잡는 행위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 내에서 샤론과 폴란스키, 릭과 클리프는 묘하게 유사한 씬들을 공유합니다. 샤론과 폴란스키가 미국으로 입국할 때, 카메라는 샤론이 전용기 내부에서 춤을 추는 씬을 담습니다. 착륙 후, 공항으로 나올 때 샤론과 폴란스키는 기자들의 환대를 받으며 등장합니다. 카메라는 샤론과 폴란스키의 뒷모습을 비추고, 그 앞의 사진기의 플래시가 연신 터지고 있습니다. 마치 그들의 앞길이 빛날 것처럼 말이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오픈카를 타고 기분 좋은 상태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동합니다.
반면 영화 종반부에 이르러 이탈리아에서 영화 촬영을 마치고 그곳에서 결혼한 이탈리아 여성과 릭, 그리고 클리프가 미국으로 입국합니다. 릭의 부인은 비행기 내부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녀는 뒤에 있을 사건 중에도 잠을 자고 있었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착륙 후, 공항으로 나올 때 아무도 그들을 반기지 않습니다. 다만 클리프가 그들의 짐을 끌고 가는 모습이 비춰지는데요. 샤론과 폴란스키에게 이러한 짐의 이동이 보이지 않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안고 있는 삶의 무게가 짐의 형태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자신들의 많은 짐을 억지로 차에 구겨 넣고,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합니다.
저는 이를 통해 샤론의 운명이 릭과 클리프에게로 향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유사한 시퀀스로 묶어 그들의 운명이 마치 디졸브 되듯이 자연스럽게 교차되었고, 바로 이 지점에서 대체 현실이 영화 속 사건으로 실현된 것 같은 느낌 말이죠. 이처럼 의도적으로 뒤바뀐 대체 현실의 클라이맥스에서 감독은 자신의 장점과 광기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영화는 통상적으로 배경이 되는 시대의 모습을 이미지를 통해 드러냅니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군인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버스의 광고판이 보이고, 버스가 지나가자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앉은 히피 둘이 보입니다. 당시 베트남 전쟁 중이던 미국 내에서 전쟁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고, 이에 평화를 외치며 히피 문화가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이 영화에서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사건인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은 히피였던 찰스 맨슨의 패거리(맨슨 패밀리)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영화 속에서 히피 문화가 몰락했던 원인, 즉 사회변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기력하고 이기적인 삶을 사는 모습과 그들이 지닌 모순적인 행태를 보았습니다.
당시 히피들은 평화를 외치며 반전(反戰)을 주장하였는데요. 이를 위해 그들이 한 행위는 마약을 통한 환각 체험과 집단 난교였습니다. 즉 그들은 현실에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문제를 외면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조지 농장(바운티 로의 예전 촬영 장소)에서 클리프가 한 히피 남성을 향해 폭력을 가하는 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클리프는 자신이 몰고 다니는 차(실제로는 릭 달튼의 차) 바퀴에 구멍을 낸 히피 남성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와 같은 폭력의 순간에 여자 히피들은 그저 자신의 거주지 앞에서 그들을 보며 소리만 지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퀀스를 통해 구체적인 행동 없이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아우성만을 반복했던 당시 히피들의 상황이 연상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순적인 삶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평화를 추구한다던 히피들이 사회에서 각종 살인사건을 벌인 점은 그들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클리프의 차를 타고 함께 조지 농장으로 가는 길에 차를 얻어 탄 히피 푸시캣(마거릿 퀄리 분)은, 연기자는 모두 가짜로 살인하는 가짜들이며, 진짜 살인은 베트남전에서 매일 같이 일어난다고 일갈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 가짜를 양산하던 스튜디오에서 자신들의 진짜 삶을 영위합니다. 그들의 삶이 가짜라는 암시처럼 보입니다. 또한, 폴란스키의 저택을 습격하려던 히피들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자신에게 살인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을 살인해야 한다는 논리로 릭 달튼의 집을 습격하기로 합니다. 살인을 가르친 자를 비판하는 자세는 살인이 비윤리적이라는 대전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론은 자신들이 배운 비윤리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대전제를 무시한 소전제로 인해 모순되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현대의 페미니즘(Feminism)은 이와 같은 히피 문화의 변질과 유사한 측면을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며,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 권리와 주체성을 확장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이론 및 운동인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을 교정하고 두 성별의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여성 참정권 운동(서프러제트)을 비롯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진행된 여성의 권익 향상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 페미니즘이 오용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히피 문화의 변질과 유사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의 경우 몇 해 전 20~30대 많은 여성들의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전 한국 사회는 조선 말기의 가부장적 분위기와 60~80년대 급격한 산업화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남성 중심적인 경향을 띠었습니다. 이에 여성에 대한 인권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것이 사실이었죠. 따라서 여성들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도록 중요한 목소리를 내었던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스트 중 몇몇 사람들의 태도는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불특정 다수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인 것처럼 일반화시킨 흑백논리를 내세운다거나, 심하면 여성우월주의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불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행보는 평등을 지향해야 하는 페미니즘의 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성의 인권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여성의 인권만’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여성의 인권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소수의 사람 때문에 페미니즘이 마치 사회에 해로운 사상이라는 인식이 생겨, 성별 갈등이 심화되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을 비롯한 평등과 관련된 사상이 사회 발전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페미니즘에 형성된 부정적인 인식이 더욱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페미니즘 역시 그 본질을 잃게 된다면 변질될 수 있음을 우리는 목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비단 페미니즘뿐 아니라 앞서 언급했던 히피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사상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등장했던 사회주의가 독재자를 만나 그 본래의 가치가 훼손되고 변질된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극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이에 대한 답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윤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BC.399)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델포이 신전에서 한 사람이 무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이죠. 이에 그는 ‘아니’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정치인, 철학자 등을 찾아가 그들의 사상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그들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자, 스스로를 똑똑한 것으로 생각했던 정치인 혹은 철학자들이 사실은 무지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삶과 사상에 있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충분히 검토하고 성찰하였는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저는 히피 혹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론을 점검하는 이른바 ‘성찰’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찰 혹은 반성이라는 말은 너무 흔한 말이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대전제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대전제에 대한 점검이 없는 한 그 생각들이 옳다는 것은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히피가 스스로의 모순을 돌아보았다면, 그 정신은 아직도 살아 있었을 것입니다. 페미니즘 역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전제 혹은 소전제를 끊임없이 검토해 보면서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릭 달튼은 ‘바운티 로’라는 서부극 드라마를 촬영하며 뛰어난 연기력과 매력을 선보인 배우였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영화에 욕심을 부려 드라마가 강제 종영됩니다.)을 한 이후, 그는 악역을 전전하는 일용직 배우로 전락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해서 그가 능력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슈워즈(알 파치노 분)에게서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제안을 받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악역 배우로 살아가다 잊힐 것인지, 아니면 이탈리아에서 주연으로 흥행작을 촬영할 것인지 선택하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처음 제안을 받은 그는 고민합니다. 릭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자부심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그 제안은 자존심에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능력에 비해 할리우드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 제안을 선뜻 거절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릭은 한 서부극에서 악당 역할을 맡았습니다. 카메라는 쇼의 주인공인 조니 마드리드(극 중 제임스 스테이시(티모시 올리펀트 분)가 연기하는 배역)가 말을 타고 술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추적합니다. 그는 문지기를 해치우고 술집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2층에서 그를 바라보던 케일럽 데코튜(릭 달튼이 연기하는 배역)가 그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리고는 2층에서 계단을 따라 제임스를 향해 내려옵니다. 이와 같은 하강의 이미지는 서부극의 최정상에 있던 릭이 몰락한 것처럼 그려집니다. 그리고 제임스와의 테이블 대화 씬에서 그는 대사를 잃어버리는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릭이 두 번째 대사 실수를 하기 전에 둘을 비추던 카메라는 좌측 방향 달리샷(dolly shot, 레일과 바퀴 달린 도구를 이용하여 이동하면서 촬영하는 기법)으로 조니의 얼굴을 비춥니다. 제임스의 배경에는 햇빛이 쏟아집니다. 릭의 대사 순서에서 카메라는 다시 이동하여 릭과 어두운 배경을 비춥니다. 이런 극명한 대비는 쇼에서의 그들의 입지뿐 아니라 릭의 대사 실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실수 후 릭은 트레일러로 돌아와 스스로에게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는 난동으로 인해 흔들리는 거울을 바라봅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흔들리고 있는 릭 자신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 거울에 비친 릭의 얼굴은 관객을 향해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에 대한 선언임과 동시에 관객을 향한 선언으로도 보입니다.
다시 촬영으로 돌아가는 릭. 모래바람을 해치며 촬영장을 향하는 릭의 모습은 극 중 한 장면이 아닌, 한 명의 연기자로 카메라에 담깁니다.(주변 촬영장 세트들과 스텝들의 모습을 통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전 시퀀스에서 제임스가 조니 역할로 술집을 향해 가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연기자로서의 릭을 담아내며 그 둘의 대비를 명료화합니다. 이어지는 촬영에서 릭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명연기를 펼칩니다. 그리고 연출자로부터 극찬을 받습니다. 이는 그의 연기 능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로부터 6개월 후, 릭은 슈워즈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탈리아에서 영화들을 성황리에 촬영한 후,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릭의 능력은 똑같지만, 할리우드에서 받지 못했던 인정을 이탈리아에서 받았다는 점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롤스(John Rawls, 1921-2002)가 주장한 차등의 원칙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차등의 원칙은 천부적 재능의 분포를 공동자산으로 간주하며, 이 분포가 어떤 것으로 드러나든 그 혜택을 공유하겠다는 합의를 나타냅니다. 이때 천부적 재능은 개인이 우연히 타고난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좋은 능력을 갖고 태어나고,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능력을 갖고 태어납니다. 이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공동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 차등의 원칙에서 롤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즉, 천부적 재능은 개인의 것이라 할지라도, 사회 내 구성원들이 지닌 능력의 차이에 따라 이득을 취한다면, 이는 우연에 의해 취득하게 되는 이익이기 때문에 이를 개인의 자산으로 보지 말고 공동의 자산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리우드는 연기력과 외모, 매력 등등 높은 능력을 타고난 배우들의 각축장입니다. 상대적으로 이탈리아는 할리우드와 비교했을 때 작은 시장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할리우드에 비해 높은 능력을 지닌 연기자풀이 적을 것입니다. 릭이 이탈리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도 있지만 이탈리아에서 재능의 우연적 분포가 그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화 속 릭의 처지를 통해 희소한 자원을 분배할 때 사람의 능력, 노력 등을 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그 기준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을 긍정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일견,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라 보상하는 공정한 분배 방식이라고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문적인 영역일수록 능력이 중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아이디어는 여러 윤리적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먼저, 실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능력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가정한 상황입니다. 즉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특히 실제로 능력이 있지만 사회에서 실패하는 경우, 그는 그 문제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치 영화 속 릭 달튼의 모습처럼 말이죠. 그렇게 될 경우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개인의 자존감만 낮아지는 결과가 뒤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결과적으로는 능력에 따라 분배한다던 사회에 대한 신뢰가 손상될 것이며, 사회적인 통합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또한 능력 있는 사람에게 실제로 분배가 되었을 경우에도 문제는 존재하는데요. 일단, 능력 있는 모든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은 거짓일 것입니다. 시험을 예로 들었을 때 동일한 능력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험 날의 컨디션이나 감정상태, 사교육의 영향, 가정환경 등 운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능력 그 자체도 우연히 주어지는 것입니다.(능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적 요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연성에 따라서 사회적 자산을 분배하는 것이 과연 공정할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능력을 기준으로 분배가 이상적으로 되었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요. 능력을 지닌 자가 성공했을 때, 그 과정에는 분명히 운의 요소가 개입되었음에도, 그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만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자만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따라서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지원보다는 멸시의 시선만을 지닐 것입니다. 반대로 실패한 사람들은 실패의 원인을 자신의 무능력 혹은 노력의 부족이라는 자신의 문제로 돌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축적된 무력감은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바뀔 것입니다. 즉 이 경우에도 사회적 통합은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주의는 교육현장에도 적용되는데요.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입니다. 수능은 국민들에게 공정한 입시 제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능은 학생이 대학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하는 능력주의적인 제도입니다. 저는 입시에서 수학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수능을 통해 측정된 결괏값만을 기준으로 대학 입학을 결정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일단 능력 자체를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지가 불투명합니다. 5지 선다로 이뤄진 선택형 시험에서 인간이 지닌 다층적, 심층적 능력을 측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또한 측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수능은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다시 줄 세우기식 경쟁으로 점수가 재편됩니다. 이와 같은 평가는 실력 있는(수능에 합격한 학생보다 오히려 더욱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탈락자를 양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수능 성적에 따라 대학에 진학할 경우, 자신의 진로나 적성과 관계없는 학과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입학생의 자퇴, 전과, 편입을 부추겨 결과적으로 사회적인 낭비를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2023년 수도권 대학 5개교 학생의 입학 전형별 학교생활을 분석한 결과 수시 중 학종으로 입학한 학생의 만족도와 성적이 높은데 반해, (9개 항목 중 긍정적인 6개 항목에서 최상위) 정시 수능 입학생의 성적, 만족도 등이 가장 낮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3개의 부정적 지표 중 2개 항목에서 수능이 최상위로 나왔습니다)** 이는 수능이 대학 입시 제도로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따라서 단지 객관적으로 진행되는 시험이라 해서 그것이 대입에 있어 가장 공정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대안이 마땅치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학생부 종합 전형(이하 학종)은 학생의 학교생활 전반을 파악하여 대학에 필요한 인재인지를 판단한다는 제도입니다. 이때 학종에서의 판단 기준은 그 학생이 현재 지닌 대학 수학 능력뿐 아니라, 잠재력, 도덕성 등 다양한 측면을 아우릅니다. 그리고 실제로 위의 기사에서도 대학 입학생들의 성적이나 만족도 등에서도 높은 수치를 보여주었으며, 실제 입학생의 출신을 보면 정시에 비해 다양한 지역과 가정환경을 지닌 학생들이 고루 선발되었기 때문에 수능에 대한 대안으로 충분히 기능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학교생활에 대한 부담을 안겨주며, 생활기록부를 구성하기 위한 고비용의 사교육이 등장하였고, 생기부를 조작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공정성 시비를 안게 되었죠. 따라서 제도의 보완이나 혹은 새로운 제도가 절실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육현장에서 수업을 하다 보면, 시험 문제로는 측정할 수 없지만, 윤리적인 해답을 창의적이면서도 심층적으로 도출하는 학생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 학생들에게 저는,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단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점수를 더 얻어야 한다고밖에 말하지 못합니다. 현재의 평가체제에서는 그 학생들의 종합적인 면모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학생들을 만났을 때 저는 그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이 적더라도, 과목별 세부능력 특기사항을 작성하는 편입니다. 객관식으로 평가할 수 없는 학생들의 도덕성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평가하고 기록하는 것이 윤리 교사로서 저의 역할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고방식의 전환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공정하다고 여겨졌던 능력주의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현시점에서, 능력주의의 공정성을 제고하고, 더 나은 기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조금 더 공정한 사회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국어사전
**출처: “학종 성적 만족도 ‘최고’ vs ‘정량평가’ 정시 교과 제적률 ‘최고’.. 수도권 5개교 전형별 입학생 분석” https://www.veritas-a.com/news/articleView.html?idxno=447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