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림책과 만나다.

읽고, 기록하는게 좋은 엄마 언어치료사 이야기.

by 말선생님





"여자의 인생은 결혼 전, 후가 아니라 출산 전, 후로 달라진다."

"출산은 인생 2막이다."



20대 중반 이후, 신랑과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시작하면서부터 자주 듣던 말이었다.

당시에는 귀에 깊숙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결혼을 하고 겨우겨우 대학원 논문을 완성하고 난 뒤, 안정적인 직장을 퇴사했다. 전혀 아쉽지 않았고 이제 석사 타이틀까지 달았으니까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퇴사 핑계를 대기도 딱 좋았다. 마침 신혼부부 전형 아파트에 당첨이 된 것이다.


'분당을 떠나 강 건너 일산으로 간다.' 설렘이 가득했다. 자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이는 20대 후반이었지만, 30대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철이 없었던 것 같다. '일산'은 정말 살기 좋아보였다. 데이트를 할 때도 좋은 추억들이 가득했고. 거리를 다닐 때마다 방송국 촬영 차들이 보이는 것도 신기했다. 마치 내가 SNS에 자주 나오는 핫플레이스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매일매일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잊고 있었다. 우리 부부가 가는 곳은 일산 중심부가 아닌 막 지어지고 있는 신도시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가임기 여성'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신도시 생활은 나름 재미있었다. 역세권이기도 했고, 20대 때 공부라는 틀에 갇혀서 다녀보지 못한 곳을 다니고, 특히 우리나라의 중심부인 경복궁 주변 나들이는 사계절 내내 다른 느낌으로. 지금 생각해봐도 특별한 추억이었다.


문제는 나는 '가임기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언어치료사'라는 직업은 사설 치료실(아동발달센터) 근무 환경이 제일 많지만 장애인복지관, 종합사회복지관, 그리고 병원에서도 근무할 수 있다. 나는 병원이 너무 가고 싶었다. 솔직히 조금 '있어 보여서'였다. 복지관에서 근무할 때, 주변에서 "어머, 좋은 일 하시네요!"라고 이야기하는 반응이 점점 불쾌해졌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석사를 한게 아니었는데. 그럼 병원에서 근무하면 좀 더 나아질까? 사람들이 나를 좋게 볼까? 지금 생각해보면 신랑에 대해 자격지심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 있는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있어 보이는 직업이 아니니까. 그럼 근무지가 병원이라고 하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력서를 냈을 때의 결과는 정말 참담했다. 6곳 낙방. 심지어 새로 개원하는 병원도 낙방했고 치료사들 사이에서 힘든 곳이라고 평이 좋지 않았던 곳도 보기 좋게 떨어졌다. 서류전형에서 합격해도 면접 단골 멘트는 "지금 신혼이신데, 임신 계획은 있으세요?", "같은 여자로서 묻기 죄송하지만, 임신은..".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당하는 그 무언가를 나도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곳도 없었다. 당시 내 친구들은 다 열심히 자신의 위치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퇴사해! 너가 있기는 그 곳이 너무 아니야. 네가 너무 아까워!" 이런 말을 해준 그 누군가도 결국 자신의 직장에서 열심히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는 것을 왜 내가 상황이 처해지니 깨달았을까.(퇴사를 희망하는 분들은 주변 말보다는 오직 '나'만 생각하시길!).


결국, 인천에 있는 특수학교 계약직으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면접 또한 6대 1의 치열한(이쪽 업계에서는 나름...)경쟁률을 뚫고 합격한거였지만 마음 속에 계속 불평은 가득했다. 도중에 장애인복지관 정규직 면접 연락이 왔지만 마음이 약해서, 또 이후 안좋은 소문이 날까봐 그냥 내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특수학교도 근무하고 싶었던 곳이었으니까. 교사들 사이에서 내 위치가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 이외에 근무 환경은 정말 편안하고 좋았다. 직장생활이 '편안하고 좋다'는게 가능하지 않겠지만 이전 직장에 비하면 수업도 3시 30분 이후로는 거의 없는 편이었고, 자기계발을 할 시간이 많이 주어졌다. 대학원 졸업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하고 싶은게 많았다. 특수교육과 편입도 하고 싶었고, 상담심리 대학원도 가고 싶었다. 비는 시간에 스펙을 더 쌓아서 1년 계약 기간을 채우고, 1급 시험을 보고, 다시 병원 정규직을 도전해보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그 해 5월, 임테기에 두 줄이 떴다.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잠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졌다. 날짜도 대충 맞는 것 같고.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후에 1급 언어재활사 시험을 치루는데는 지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예정일도 2월이었고, 지금 근무하는 곳에서 계약기간만 채우면 아이 좀 더 키우다가 그 근처 자리를 찾는 걸로.

그런데 '입덧'이라는 무서운 존재도 함께 찾아왔다. 6주부터 시작된 입덧은...39주까지 지속되었다는 슬픈 소식. 개인치료실이 있어서 그 곳에 선물받은 디퓨저를 놓았는데 우선 그 냄새를 생각만해도 변기와 인사를 하게 되었고, 아이스크림 이외에 음식은 거의 손을 못댔다. 모든 남편들이 다 하는 것 같은 음식 셔틀이 시작되었지만 먹고 나면 다시 화장실행이었다.(남자들이 군대를 다시 가는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던데. 나는 지금 입덧이 그렇다.) 도무지 직장을 다닐 수가 없었다. 신랑이 합정역에서 내려주면 인천까지 혼자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야하는데 합정역은 모든 향수 냄새를 다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는 시간 외에는 멀미를 달고 사는 것만 같은 하루하루였다.

주변에서 만류가 있었지만 그 해 7월 퇴사를 했다. 아이가 어느정도 성장하기 전 내 인생의 마지막 풀타임근무가 될지 전혀 모른채. '아이 낳으면 한 백일 지나서 어린이집 보내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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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중기로 들어서면서 감사하게도 임산부 신분으로 프리랜서 근무도 할 수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근무를 하는건 석사 이후로 처음이었다. 내 수업이 있을 때만 가서 수업을 진행하고 퇴근하면 되는 체제여서 막달까지도 큰 무리는 없었다. 단지 고용해주신 분께 너무 죄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을 다시 하려면 친정 근처에서 지내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결국, 다시 분당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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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9. 딸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났다. 나는 이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조리원 퇴소와 함께 소위 말하는 '그 전쟁'이 시작되었다. 100일 이후 복직은 커녕 아이가 자는 시간 외에는 내 시간이 없었고, 그 자는 시간조차도 정말 불규칙했다. 하루는 아이가 새벽이 지나서도 쉴 새 없이 울어서 친정 엄마가 달려온 적도 있었다. 아이들을 10년 가까이 가르쳐왔고, 그것도 디테일하게 언어발달 부분을 봐왔고, 상담을 하게 되면 신체적인 발달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정작 내 아이에게는 머릿속이 백짓장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하는건가?

아이를 재우고 난 뒤에 구인구직 사이트를 들어가서 갈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그건 그냥 나의 만족을 채우기 위한 일종의 행동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조리원 동기들과 연락을 하고, 어떤 기저귀가 발진이 덜한지, 어떤 분유가 좋은지, 100일은 셀프 백일잔치가 좋은건지 그런 것들을 알아보기만 해도 하루가 다 지나가있었다.





100일이 지나고 나면 한숨 돌릴 틈이 생긴다고 했는데. 조금은 그런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육아서적을 찾아보는게 나을까? 그런데 육아서적 안에도 큰 답이 없을 것 같았다. 괜히 죄책감만들 것 같고, 나는 일이 하고 싶은데 '육아'라는 방 안에 갇혀버리게 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아이가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몸짓 하나하나가 너무 사랑스럽고 옹알이 소리, 눈맞춤, 안길 때의 그 느낌 하나하나가 지금도 다 기억이 날 만큼 소중했다. 무언가를 해야 에너지가 샘솟는 나 자신과 마주하는게 버거울 뿐이었다.


한 가지 찾은 답은 육아서적인듯 아닌 책을 읽는거였다. 아이와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부부의 책이었다. 유명한 출판사도 아니었다. 책의 줄거리는 특별한 것도 없었다.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던 부부에게 생긴 아이에 대한 이야기. 그 부부는 유산을 한 번 겪은 부부였다. 작가분이 일을 하면서 뱃속에 아이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고 적혀있었다. 그래서 지금 찾아온 아이가 너무 소중하다고. 작가님의 블로그를 들어가보니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았다. '글을 쓰는 것'.

나도 부족하지만 묵혀 두었던 블로그에 육아 이야기, 언어치료 이야기를 하나둘씩 풀어나갔다. 아이가 잠든 뒤에 쓰는 글은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특히, 언어치료 교재교구 소개글을 쓸 때는 이웃 수가 늘어나는게 한 눈에 보였고 나와 비슷한 육아의 길을 가는 선배님들과도 소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답이 '그림책'이었다. 임신했을 때 다짐했던 것 중 하나였는데. 아이에게 전집이 아닌 낱권의 그림책을 골라서 보여주고 싶었다. 한 방송국의 유명 아나운서가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그림책 채널을 오픈하게 되었는데 그 채널 영향도 컸다. 그리고 괜한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 언어치료사 엄마는 전집을 사지 않는다. 내가 골라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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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어떤 책을 골라야할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 수업을 할 때는 그림책을 활용한 적이 있었는데. 내 아이에게 그림책을 보여주기 위해 엄청난 포부와 다짐으로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중고서점에 갔는데 아는 책이 하나도 없었다. 그림책도 공부가 필요하다는걸 느꼈다.


그림책 관련 책을 보이는대로 구입해서 보기 시작했다. 작가분들의 공통점은 육아를 하면서 그림책에 빠져들게 되셨다는 점인데. 그림책이 육아 우울증을 해소하는데 한 몫을 크게 했다는 점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것 같았다. 그림책을 보면 어릴 때 추억이 소환되기도 하고 내가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출근하는 여자들이 부럽고 퇴근하는 여자들이 부럽고 sns속 친구들의 모습이 부러웠지만 그림책을 읽어줄 때는 그런 감정들을 모조리 잊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이도 그림책을 좋아했다. 30개월이 되어가는 지금도 약간 편식을 하는 편이긴 하지만. 책이 너덜너덜해지고 하루에도 10번이 넘게 같은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모습을 볼 때 정말 뿌듯했다. 우리 부부는 지금도 아이에게 웬만하면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 영상예배를 어쩔 수 없이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6개월이 될 무렵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 직장 구인 공고가 떴다. 신이 나에게 주시는 자리 같았다. 일주일에 한 번. 친정엄마 도움을 구하기도 좋았고, 수유를 서서히 끊기도 좋았다. 일주일에 두 개, 5개, 일주일 2일 출근, 3일 출근. 이렇게 서서히 늘려갔고 그 다음 해에는 시댁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아이도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고 나도 나의 일을 조금씩 더 늘려갈 수 있었다.


여전히 마음 속에 '병원 정규직'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다. 작년 12월 이제 아이도 어린이집에 적응도 하고 24개월이 지나가니까 지원해보려고 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지금 직장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곳에 파트타임으로 출근하는 것보다 더 나은 조건은 없었다. 아이 등하원을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그대로 돈이 나가는 거였고, 무엇보다 아이의 정서가 트이는게 느껴져서 남에게 맡기는게 불안했다. 친정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아이 등원을 챙겨줄 여력이 되시지 않았다.


안정적인 길이냐 프리랜서냐. 아이를 남에게 맡기느냐(친정엄마 포함) 내가 그래도 보느냐. 아이 엄마는 평생 이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는걸 배우고 있었다. 결국 지금 다니는 직장을 유지하면서 새로 개원하는 소아정신과에 프리랜서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여전히 근무체계는 불안정하긴 하지만 아이 등하원은 적어도 일주일에 2일 이상은 내가 시킬 수 있어서 그 부분은 감사한 것 같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수업 때 만나는 아이들에게도 그림책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대부분 발음이 좋지 않은 아이들, 학교에서 소위 '공부 못하는 아이들' 이미지의 아이들에게 그림책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코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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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오랫동안 육아를 하신 분의 블로그를 들어가다보니 또 다른 블로그가 연결이 되고, 하나의 책을 알다 보니 또 다른 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 인스타그램은 나를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작가분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그렇게 아름아름 아이들과 수업을 할 때 그림책을 도입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선생님, 오늘은 무슨 책 읽어줄꺼에요?"라고 무관심하듯 묻는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게 되었다. 그림책은 힘이 있었다. 육아 우울증을 해소하는 힘. 학교에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던 아이의 마음을 조금씩 여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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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40분 세션 안에 짧게 들어갈 때가 더 많지만 꾸준히 그림책과 만나고 있다. 아이들과 그림책을 연결해주기도 하고 내가 소개팅을 받듯이 소개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간들이 늘 완벽하고 변화가 뚜렷하고 드라마틱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굳어질 때도 있고, '좋아요' 한 단어로 감상평을 끝낸 적도 있다. 무겁게 폭염 속에서 쇼핑백 안에 그림책을 넣어서 출근한 보람이 그렇게 끝날 때도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림책과의 여정을 시작하려고 한다. 두서가 길었다. 그림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나의 출산여정까지. 그림책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다 아이 엄마는 아니지만 출산 여정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시는 이유가 있구나. 또 생각하게 된다. 코로나 19로 인한 불안감, 이 또한 그림책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림책이여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무언가를 계속 고민하고 풀어나갈 수 있다는 그 힘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