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하고 싶은 사람 있는지? 나는 있다. 멀쩡히 잘 지내다 문득,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과거의 악연.
살다 보면 복수의 칼날도 갈아야 하고, 청소기도 밀어야 하고, 빨래도 널어야 하고, 뭐 그런 것이다.
한가로운 아침. 내 방에서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창 밖 가을 하늘을 구경하는데, 쌩뚱맞게 그 작자가 떠올랐다. 편도체에 깊이 각인되어 언제 떠올려도 호흡부터 가빠지게 하는 사람. ‘아차차, 깜빡했다, 복수’랄까, 그 인물에게 응당 돌려줘야 할 것을 여태 돌려주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는 마음이 공연히 바빠졌다. 회신이 늦어져 상당히 죄송하고, 지금이라도 복수할 방법을 궁리...하려다 보니, 오, 그 분의 생사조차 모르는구나.
그렇게 그 자에 대해 얼마쯤 생각했을까. 눈 앞에 이런 이미지가 펼쳐진다.
어느 깊은 밤. 숲 속. 올빼미 울음소리. 검은 도복과 복면으로 무장하고 등에 장검을 찬 내가 있다. 저 앞에는 과거의 한 시절 나를 곤경에 빠뜨린 사람이 하얀 도포를 입고 걸어간다. 그는 어쩐지 오늘 밤 길은 유난히 스산하고 수상하다고 느끼며 자신의 집을 향해 잰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나는 그에게 나의 존재를 들키지 않도록 나무와 나무 사이로 빠르게 몸을 옮겨가며 뒤를 쫓는다. 그러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판단했을 때 그의 이름을 불쑥 부른다. 앞서 걷던 그는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춘다. 나는 다시 한 번 더욱 크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뒤돌아본다. 깊은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은 내 눈에 한 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서서히 앞으로 다가간다.
"ooo. 맞지."
"웬 놈이냐...!"
"나다. ooo. 네가 예전에 함부로 능멸했던."
"말도 안 돼! ooo이 어떻게 여길..."
"이 날만을 기다렸어."
"아냐! ooo이 내 앞에 나타날 리 없어!"
점점 뒤로 물러서는 그. 나는 복면을 벗는다. 이마에 땀. 그와 내 머리 위로 달빛이 환하게 비친다. 그 순간, 그와 내 얼굴이 처음으로 서로에게 또렷하게 보인다.
…누구…?
우리는 서로를 못 알아본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각자 너무 변했기 때문이다. 내가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과거의 모습과 영 딴판이다. 장검을 쥔 손의 힘이 풀린다. 나는 낯선 이를 앞에 둔 채 주저하고 당황한다. 복수해야 하는데, 분명 그 사람이 맞는데,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상대편도 마찬가지다. 그는 흰머리 희끗하고 피부에 탄력을 잃은 나를 오래 응시한다. 저기, 초면에 제가 귀하의 칼을 맞아도 될까요? 하는 뻘쭘한 표정으로. 그렇게 짧지만 긴 시간이 흐른다. 나는 그에 대하여 아무 할 일이 없음을 깨닫는다. 다시 칼을 등에 차고 왔던 길을 돌아간다.
그러니까, 내 말은, 오래 전 일에 대한 복수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복수의 대상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은데, 복수에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인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서로 인연이 닿았을 때와는 여러 면에서 달라져 있을 것이다. 외모, 취향, 성향, 건강, 재정상태, 가족구성원, 직장, 직업 등등. 그를 그로써 인지했던 요소들이 변화했을 때, 도대체 내가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 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물론 현재의 그가 이전의 그와 아무리 다르다 할지라도, 현재의 그에게나마 충격과 상처를 주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나도 변하고 그도 변하는 마당에, 한 때 우리가 맺었던 인연에 대한 평가 값만을 그대로 두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나는 나에게 못되게 군 사람에게 직접 나서서 복수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도 소식을 듣거나 마주치는 일이 영영 없으면 좋겠다.(생사 여부조차 모르는 걸 행운인 줄 알아랏!) 다만 그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는 옛사람 말이 대개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하기로 한다. '인연과보' 혹은 '인과응보'. 요즘 말로 ‘지팔지꼰'. 남을 마구 짓밟는 사람들은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다. 그 장대한 파국의 여정에 나까지 굳이 참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옛사람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했지.
될 놈 될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그런 데서 인생에 입체감이 생기는 거니까. 이렇게 쓰고 보니 복수 그까짓 거, 나는 애당초 관심조차 없던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