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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pr 17. 2024

한국화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석기자미술관㊴ 기획초대전 <한국화 3세대의 물결>

한국화, 동양화, 서양화의 구분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그저 그림이 좋으면 그만이다.     


한벽원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초대전 <한국화 3세대의 물결>은 1912년생부터 1988년생까지 70년을 훌쩍 넘는 나이대의 한국화 작가 27명의 작품을 모아 선보이는 자리다. 7~80대 원로들로부터 그림을 배운 5~60대 화가들, 그리고 또 그들로부터 배운 3~40대 청년, 즉 ‘3세대’로 이어지는 미학적 가치와 화풍의 흐름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특정한 주제에 초점을 맞춰 정교하게 설계한 전시는 아니다. 

그저 그림이 좋으면 그만이다.    

 

최순녕 <봄의 노래 Songs of Spring>, 116.8×182cm, 한지에 수묵과 혼합재료, 2024

     

여기, 봄 내음이 물씬 나는 그림이 있다. 꽃 대신 가장 일찍 잎을 피워올리는 버들가지의 푸르름이 싱그럽다. 그리고 옆에는 봄이 왔음을 예찬하듯 악보가 그려져 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24번 봄(Spring)이다. 그림에서 봄의 소리가 들린다.     


최순녕 작가는 한지에 수간안료와 과슈를 섞어 쓴다. 일반적인 붓질로 한지에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혼합한 물감을 한지의 앞과 뒤에서 단단하게 밀착시켜 한지의 특성이 훼손되지 않게 한 뒤 마르거나 젖은 상태에서 먹으로 작업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화가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 수묵의 조형미를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의 흉중에 새겨진 이상적인 자연의 형상과 청각적 음률을 작업의 화두로 삼고 있다

이 모든 형식의 작업들은 마음의 정화로 이어지고,

그 이상향은 수묵이란 매재를 통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화면에 안착시키는 일이다.

형상 밖의 형상(刑象以外刑象)”이라는 나만의 유토피아를 찾는 일이기도 하며,

내 안에 들어선 형상과 음률의 화해를 수묵화의 형상으로 드러내는 나만의 수묵 놀이에 치중하고 있다.   

  

양정무 <情景文融소나무·안식의 빛 아래>, 70×140cm, 장지에 수묵, 2023

    

먹그림으로는 양정무의 작품에 주목한다. 진하고 연한 먹의 농담을 통해 아스라하고 그윽한 운치를 자아내는 그림이다. 소나무 잎사귀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화가의 단단한 붓질이 믿음직하고, 꼼꼼하게 묽은 먹으로 채워 넣은 바탕은 장지 특유의 질감이 왜 먹과 어울리는지 잘 보여준다.   

   

자연에 몰입하면 현실의 찌꺼기가 훌훌 벗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은 영혼을 정화하는 힘이 있다시간이 멈춘다눈앞의 장면과 내밀하게 조응한다.

그러면 시적 진공상태 같은 묵시적 장면을 마주한다감각이 사라지고 평범했던 모든 일상이 새롭다.

시간이 멈춘 듯 찰나가 영원 같다시야가 열리며 풍경을 창조한 창조자의 은혜가 보인다.

은혜의 장면이 나를 소명으로 이끈다기도하듯 한 필 한 필 붓을 놀리며 나의 소명에 대해 묵상한다.   

  

임철민 <물 웅덩이가 있는 골목>, 2023, 장지에 수묵, 70×140cm


참여작가 가운데서 가장 어린 임철민의 먹은 짙다. 무겁게 내려앉은 도시의 밤을 촘촘한 붓질로 빼곡하게 채웠다. 그리고 그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과 신호등 불빛만큼 보이는 거리는 인적 없이 쓸쓸하다. 먹으로 얼마나 많은 색을 표현할 수 있는지 보라.      


핸드폰마저 꺼진 저는 도시 한복판에서 조난됐다는 자각과 함께 낮의 공단을 떠올렸습니다.

이곳은 원래 차량으로 빽빽한 도로와 오디오를 가득 채우는 공장의 소음과 사람들의 고함이 들리는 우리의 욕망이 교차하던 무척 뜨거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지역의 간극에서 공단의 속성이 차갑고 뜨거운상반된 것의 중간을 왕래하며 중심을 잡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제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었습니다이때의 경험을 가져와 우리의 형태를 은유하기로 했습니다.     


신태수 <섬>, 73×142cm, 한지에 먹과 채색, 2024

     

채색화로는 신태수의 작품을 눈여겨본다. 신태수 작가는 1년 반 동안 서해5도를 돌며 남과 북, 바다를 한 화폭에 그린 백령도 풍경화가 2018년 4월 역사적인 1차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 걸리며 큰 관심을 받았다. 성실한 사생을 바탕으로 단단한 풍경화를 주로 그린다.     


<섬>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서 우리는 커다란 고래 한 마리를 본다. 한지에 먹과 채색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조형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고래가 춤춘다.     


김현철 <울산바위>, 80.3×233.6cm, 린넨에 수묵채색, 2024

 

이론과 작업을 겸비한 화가 김현철은 설악산 울산바위의 야경을 화폭에 재현했다. 화면을 삼분할하는 안정적인 구도의 중심에 병풍처럼 두른 바위가 자리하고, 화면 왼쪽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운해가 정적인 화면에 변화의 신비로움을 더한다. 전시 출품작 가운데 가장 큰 작품이자, 대표작의 하나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언어학에서 소통은 실상 소박한 것으로 반은 내가 누구에겐가 말하는 것이고 나머지 반은 내가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이다.” 시각 언어인 점, 선, 면, 색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미술활동의 소통도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창작자의 미의식 결핍 또는 상실된 미술작품은 간혹 정보와 사실을 전달하는 일방적인 강요로 비칠 수도 있다. 정보와 사실의 전달은 어느 장르 어떤 언어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미술에서의 그것은 시지각적 조형언어에 의한 미적 체험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루K <맛있는 산수(마라탕)>, 116.8×91cm, 한지에 수묵채색, 2024

     

젊은 채색화의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가로 하루K라는 화명을 쓰는 이가 있다. <맛있는 산수>라는 제목부터 재미있다. 젓가락에 걸려 올라오는 저 면발을 보라. 화가는 한때 크게 유행했던 음식 ‘마라탕’에 산수를 가득 얹어 ‘맛있는 산수’라며 우리에게 들이민다. 그림 아래 서명도 예사롭지 않다. 대문자 K의 끝에 붓을 댄 사람은 화가 자신일 터.     



전통 동양회화를 일상적인 소재(음식, 사물)에 빗대어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일상적인 소재(음식, 사물)와 산수풍경을 결합하여 과거 산수화에 내재된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 싶은 선비의 이상향이 아닌 물질문명이 결합된 현대인의 이상향을 보여준다.     


김규리 , , 87×93cm, 한지에 금분과 호분, 2023

    

배우 김규리의 그림은 한마디로 놀라웠다. 김규리는 2008년 영화 <미인도>에서 혜원 신윤복을 연기하기 위해 유명 화가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그것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 계속 그림을 그려오고 있다. 한지에 금분과 호분으로 그린 표범 그림은 이 예사롭지 않은 배우의 숨은 솜씨를 보여준다. 취미를 훌쩍 넘어선 수준이다.  

   

조풍류 <자은도에 핀 매화>, 24.2×33.4cm, 캔버스 천에 먹, 호분, 분채, 석채, 2024

     

봄꽃의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나뭇가지마다 푸른 잎이 쑥쑥 자라난다. 꽃을 그냥 보내기 못내 아쉬운 마음은 조풍류의 매화 그림으로 달래련다. 전남 신안 자은도에 터전을 마련한 화가가 올봄에 처음 만난 벗들을 화폭 위로 불러냈다.


미리 찾아온 봄 날씨인가 싶은데 다시 겨울이 찾아오고 그러다 또다시 봄으로 바뀌고

계절이 한번 바뀌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겨울이 춥고 길다지만 그래도 어김없이 봄과 함께 찾아와 준 저 애잔한 매화꽃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화폭에 담았습니다.     



전시 정보

제목기획초대전 <한국화 3세대의 물결>

기간: 2024년 4월 27()까지

장소한벽원미술관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83)

문의: 02-732-3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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