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석 Apr 18. 2024

초상화 앞에서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석기자미술관㊵ 베르트람 하제나우어 <거울 자아>

<Untitled>,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80cm


여기 한 여성의 초상화가 있다. 이 여성은 누굴까. 화가와 특별한 관계에 놓인 사람일까. 아니면 우리는 모르지만, 그림에 등장할 만큼 중요하거나 특별한 존재일까. 이유 없는 초상화는 없다. 그림 속 인물에게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화가는 자신의 주인공에 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 제목도 <무제(Untitled)>다.     


이 그림에서 화가가 취한 구도는 엄격하다. 화면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는 선을 눈으로 그으면, 정확하게 여인의 정수리 꼭대기에서 오른쪽 눈썹과 눈동자 가장자리를 지나 윗옷의 좌우 깃이 만나는 지점을 통과한다. 화면을 위와 아래로 나누는 선을 그으면, 정확하게 코끝을 지난다는 걸 알 수 있다. 대각선을 그어 보면 화가가 취한 엄격한 구도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화면 위와 아래는 색으로 구분된다. 윗부분은 배경부터 얼굴까지 한 가지 색으로 그려졌고, 아래 절반은 입술과 옷의 분홍으로 연결된다. 창백한 피부, 짧게 자른 머리, 굳게 다문 입, 그리고 관람객을 바라보는 눈동자. 화가가 옅은 물감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여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표백된 존재’를 대면하는 것만 같다. 끝내 그림 속 여인의 정체는 불문에 부쳐지고, 관람자에게는 뜻하지 않은 ‘갈증’만 남는다.

     

베르트람 하제나우어(Bertram Hasenauer)


오스트리아 태생의 작가 베르트람 하제나우어(Bertram Hasenauer, 1970~)는 주로 패션 잡지에서 찾을 수 있는 이미지로부터 초상화 작업을 시작한다. 소비주의 문화의 과잉과 허영을 드러내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 슈퍼모델들의 이미지를 수집해 콜라주로 재구성한다. 이 과정을 반복해 이미지의 본래 맥락을 완전히 벗겨낸 뒤, 그 형태를 다시 한번 사진으로 찍은 다음 캔버스에 옮긴다. 이미지는 표백된다.   

  


원래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화려한 겉모습은 사라지며 드러나는 것은 결국, ‘형상의 본질’, ‘존재의 본질’일 터. 엄격한 해체와 정제를 거쳐 대상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면 구체적인 요소들은 더 추상화된다. 극도로 절제되고 다듬어진 형상만 남는다. 인물의 뒷모습이나 특정 신체 부위, 이를테면 귀, 손, 팔을 보여주는 그림들은 더 큰 상상의 영역으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초상화라는 장르는 관객의 욕망을 이끌어내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한다그런 점에서 초상화는 보는 이의 상상과 결부될 때 진정한 잠재력을 발휘한다.”  


광택제(lacquer)와 젯소, 은첨필(silverpoint)로 화면을 까맣게 뒤덮은 초상화 속 인물들은 쉬이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단색조의 초상화는 관람객에게 그림 가까이 바짝 다가가 얼굴과 표정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짙은 어둠 속에 자신의 감춘 존재는 더 크고 넓은 미궁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처음에 언급했던 엄격한 구도가 실제 구체적인 선으로 화면에 반영된 작품도 있다. 접힌 자국이 선명한 이 작품들은 어린 시절 가족과 친구, 오래전 내 모습, 지난 시대를 산 이들의 오래된 사진을 마주하는 것 같은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전시의 영어 제목은 <Sense of Self>. 우리말로 옮기면 자아감(自我感)으로 해석된다. 앞서 인용한 작가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그림 속 인물이 아니라 그 존재와 마주 선 나, 그리고 당신이다.     


전시 정보

제목베르트람 하제나우어 개인전 <거울 자아>

기간: 2024년 4월 27()까지

장소초이앤초이 갤러리(서울시 종로구 팔판길 42)

문의: 070-7739-880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