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17) 구와바라 시세이 베스트 사진전 <다시 돌아본 한국>
하나. 얼마 전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의 새 사진전 보도자료가 이메일로 왔다. 일본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가 1964년부터 50년 넘게 찍은 한국 사진을 엄선해 선보인다고 했다. 보도자료와 첨부 이미지를 일람한 뒤 평소 하던 대로 X에 짤막한 전시 소식을 포스팅하고 메일을 지웠다.
둘. 며칠 전 어떤 필요에 따라 2023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전 <지천명에 화답하다> 도록을 다시 들췄다. 그림 몇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가장 주목한 그림은 손장섭 화백의 1960년 작 <사월의 함성>. 1960년 4월 19일 혁명 당시 서라벌고등학교 3학년이던 손장섭은 거리에 스케치하러 나갔다가 시위대를 만났고, 그 장면을 수채화로 그려 남겼다. 4.19혁명 현장을 기록한, 한국 미술사에 전무후무한 그림이다.
또 한 작품이 있었다. 한국화가 김호석의 1992년 작 <침묵시위>. 종이에 먹으로 그린 그림으로는 가로, 세로 181cm에 이르는 대작이다. 전시회를 취재할 때는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이 그림 또한 시위 현장을 담고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2017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청년의 초상>에 출품된 적이 있는데, 당시 박물관이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화가가 4·19혁명 5주년 기념식을 포착한 사진을 토대로 그렸다고 했다. 모든 언론이 기사에 그렇게 썼다.
셋. 평소 하던 대로 페이스북을 뒤적거리다가 갤러리 인덱스의 포스팅을 봤다. 첨부된 사진 가운데 어디선가 본 장면이 있었다. 기시감. 서둘러 고려대학교 박물관 도록을 다시 펼쳤다. 김호석의 <침묵시위>를 찾아 사진과 나란히 놓고 봤다. 빙고! 김호석 화백이 토대로 했다는 바로 그 사진이 갤러리 인덱스에서 전시하는 일본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작품이었다. 뭔가 커다란 비밀 하나를 푼 기분이었다. 이메일 휴지통을 뒤져 삭제한 갤러리 인덱스 보도자료 이메일을 다시 불러냈다.
넷. 궁금한 건 죽어도 못 참으니 열 일 제쳐 놓고 갤러리로 달려갔다. 문을 열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첫 작품이 바로 문제의 바로 그 사진 <한일회담 반대데모>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1965년 한국에 와서 수도권에서 연일 격렬하게 벌어지던 한일 국교 회담 반대 시위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이때 찍은 사진은 지금까지도 구와바라 시세이의 대표작이자 최고작으로 꼽히는 기념비적인 사진이다. 그해에 찍은 베트남 파병, 청계천 사진도 귀하다. 그의 사진이 “한국사진의 공백을 메워주는 귀중한 작업”으로 평가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섯. 1964년 7월 14일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일본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는 지금까지 100차례 넘게 한국을 찾아와 장장 60년 동안 격동기 한국의 변화상을 10만 컷이 넘는 사진에 담았다. 작가가 젤라틴 실버 프린트 방식으로 뽑아낸 사진 가운데 이규상 눈빛출판사 대표가 40여 점을 엄선해 전시장에 걸었다. 기왕에 출간했다가 절판한 구와바라 시세이 한국 사진전집도 <격동한국 50년>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펴낸다. 1936년생으로 올해 88살이 된 구와바라 시세이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에 와 11월 19일 오후 4시 인사동에 새로 문을 연 갤러리 안터에서 진행되는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