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22) 《평보 서희환: 보통의 걸음》
평보 서희환(平步 徐喜煥, 1934~1995)은 1934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붓글씨를 잘 썼다. 학창 시절에 쓴 글씨를 보면 안다. 이미 학생의 솜씨를 아득히 넘었다. 스무 살 되던 해인 1954년 제2회 전국교육주간 국제학생작품전람회에서 서예부문 수석을 차지한다. 이듬해인 1955년 제4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낸다. 서희환은 자기가 잘하는 길로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1955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 목포 유달국민학교 교사가 됐다. 그해에 목포 청호다방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연다. 그리고 바로 그해에 서예가로서 생에 큰 분수령이 되는 스승 손재형을 처음 만난다. 1958년 광주 아카데미 다방에서, 1960년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서희환은 스물일곱 되던 1961년 당대 최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을 스승으로 모신다.
1963년 제12회 국전과 1964년 제13회 국전에서 입선하고, 1965년 제14회 국전부터 1967년 제16회 국전까지 삼 년 내리 특선을 거머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8년 제17회 국전에서 한글 전서로 쓴 <애국시>로 대통령상을 받는 쾌거를 거둔다. 미술 전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국가 공모전에서 서예, 그것도 한글 서예로 최고상을 받은 것은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돋보이는 성공 뒤에 시련이 뒤따랐다. 당대의 서예가 중 한 명인 여초 김응현은 서희환의 수상작을 두고 “국문 전서는 글씨도 아니다.”라며 “전범이 없는 글씨는 서예라 할 수 없다.”고 혹평했다. 스승의 후광을 등에 업고 상을 받은 거 아니냐, 스승의 글씨와 지나치게 비슷해서 뚜렷한 개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비판만큼 확실한 동기부여가 없었다. 서희환은 자신에게 쏟아진 비판을 계기로 심기일전해 자기만의 글씨 예술을 만들기 위한 큰 걸음을 내디딘다. 일찍부터 한글 서예에 매진해 온 서희환은 시간을 거슬러 한글의 뿌리가 되는 고전(古典)으로 눈을 돌린다.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등 조선 전기 한글 판본에서 한글의 원형을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자기만의 개성 있는 글씨를 만들어내고자 진력한다. 1981년 선면(扇面)에 쓴 글씨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서희환은 더 나아가 조선 후기 궁중 글씨와 민간 글씨에서 자연스러운 붓의 흐름을 익히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품격 있는 자기만의 글씨체를 완성해 나간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길이었다.
글씨와 그림의 뿌리가 다르지 않았다. 같은 붓에서 나온 글씨와 그림이 어울린 서희환의 문인화를 보면 글씨가 곧 그림이고 그림이 곧 글씨가 되는 높은 경지에 올랐음을 보게 된다. 서희환의 글씨에서 보이는 특유의 회화적인 묘미는 실로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서희환은 평생에 걸쳐 시인들의 시를 글씨로 썼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읽고 즐길 수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걸 아주 높은 예술적 완성도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희환 글씨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이 대목에 이르면 스승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확고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서희환 특유의 ‘평보체’가 가진 매력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다. 서희환의 글씨가 돋보이는 까닭은 그 안에 시심(詩心)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기교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런 마음, 그런 성정이 없이는 좋은 예술이 나올 수 없다. 예술을 완성하는 건 기교가 아니라 시심이다. 서희환의 글씨는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서희환은 1968년부터 수도여자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72년 수도여자사범대학, 지금의 세종대학교 회화과 교수가 된다. 이후 1994년 퇴직할 때까지 22년 동안 자신이 몸담은 수도여자사범대학을 비롯해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등 수많은 현판 글씨를 썼다. 심지어 전시가 열리는 예술의전당 현판 글씨도 서희환의 작품이다. 바로 그 예술의전당에서 서희환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으니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올해로 서거 3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한글 서예 대표 거장 평보 서희환의 대규모 회고전 《평보 서희환: 보통의 걸음》이 7월 11일(금)부터 10월 12일(월)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다. 초기작부터 말년작까지 서희환의 예술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글씨 120여 점을 한자리에 선보이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다. 현대 한국 서예에서 서희환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이런 전시는 진작에 국립미술관이 기획했어야 마땅하다. 작금의 서예계와 미술계는 국내 최고의 서희환 전문가 황정수 선생이 전시 평론에 쓴 아래와 같은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제 저물어가는 한국 서예를 살리기 위해선 서희환에 대한 연구와 전시, 선양 작업을 통해 서희환 못지않게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작업하는 작가를 발굴, 계승하여야 한다. 요즘 한국 서예계에 ‘서예는 없고 캘리그라피만 있다’는 말이 나돈다. 그만큼 서예는 소외되고, 캘리그라피는 약진한다는 뜻이다. 소위 ‘멋글씨’라 불리는 캘리그라피는 어찌 보면 서희환의 선행 작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작업하고 있는 형식의 대부분이 이미 서희환의 작업 속에 격조 높은 상태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서희환의 생각을 읽을 수만 있다면 한국 서예의 미래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희환은 평보(平步)라는 호(號)에 담은 겸양(謙讓)을 훌쩍 뛰어넘어 한국 서예의 큰 걸음을 내디딘 거인이다. 서예가 마냥 어렵기만 했던 내가 글씨를 보면서 안구를 정화하기는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