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26) MMCA 해외 명작 《수련과 샹들리에》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람객을 엄습하듯 동공을 후려치는 작품이 눈앞에 성큼 다가온다. 미국의 개념미술 작가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의 <모욕하라, 비난하라>. 날카로운 바늘로 눈을 찌르려는 위기일발의 순간을 담은 섬뜩한 사진 위에 모욕하라(SHAME IT), 비난하라(BLAME IT)이라는 글자가 얹혀 있다. 미디어와 시각적 이미지가 개인에게 가하는 위협과 폭력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해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주는 작가 특유의 작업 방식을 보여준다. 바바라 크루거는 잡지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던 1970년대 후반부터 대중매체를 통해 수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병치시키는 작업으로 이름을 알렸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은 크루거의 문장들은 온전한 진실과 고정관념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을 본다. 코로나바이러스 유행이 한창이던 2022년 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2022.4.28.~8.28)에서 그때까지 한 번도 대중에게 공개된 적 없었던, 책에서나 보던 바로 그 모네의 수련 앞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더랬다.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모네의 그림 앞에 다시 섰다.
뚜렷한 윤곽선 없이, 말 그대로 연못의 정경이 주는 ‘인상’을 그린 ‘연못 그림’일 뿐인데, 빨려들 듯 마음이 절로 끌리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평범한 풍경에서 비범한 감흥을 끌어내는 것, 바로 그것이 거장이고 명작이 아니겠는가. 안목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건희컬렉션 덕분에 우리도 모네의 수련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국내에 단 하나뿐인 모네의 <수련>을.
온통 새까맣게 채색된 기괴한 샹들리에가 미술관 천장에 고정된 줄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제목이 샹들리에(Chandelier)다. 샹들리에는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의 상징이다. 하지만 <검은 샹들리에>는 그런 본래의 기능이나 외관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과 동물의 뼈와 장기 조직으로 이뤄진 이 섬뜩한 모습의 조형물은 직관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샹들리에가 ‘빛’이라면 <검은 샹들리에>는 ‘어둠’이다. 암흑이고, 죽음이다.
중국 태생의 문제적 작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1957~)는 베이징 영화학원에서 공부한 뒤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마르셀 뒤샹, 앤디 워홀 등의 작품을 통해 일상적인 재료를 이용한 개념미술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의 작품이 문제적인 이유는 작품을 통해 개인의 인권과 표현의 자유, 난민 문제 등 동시대 현실의 제반 문제를 비판적인 시각적으로 과감하게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과 아이 웨이웨이의 <검은 샹들리에>에서 각각 한 낱말씩 따서 붙인 것이 이번 전시의 제목 《수련과 샹들리에》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해외 미술 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를 10월 2일(목)부터 2027년 1월 3일(일)까지 과천에서 연다. 이건희컬렉션 16점을 포함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해외 미술가 33명의 작품 44점을 엄선해 선보인다. 이 가운데 4점은 소장 이후 최초 공개작이다.
미술관의 수집에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 먼저 돈을 주고 직접 사는 ‘구매’다. 가장 일반적인 미술품 수집 방법이다. 하지만 미술관의 구매 예산은 뻔하다. 세계적인 미술가들의 값비싼 작품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다. 이럴 때 긴요한 게 바로 ‘기증’이다. 이번 전시에 무려 16점이 포함된 이건희컬렉션이 대표적이다. ‘기증’은 영양실조에 걸린 공공미술관을 살리는 밥이다.
그런데 최근에 미술품을 수집하는 새로운 방식이 국내에서 도입됐다. 미술품 물납제다. 상속세나 증여세를 돈 대신 미술품으로 낼 수 있도록 한 제도로 2023년 1월 2일 관련법이 개정되면서 도입됐다. 어마어마한 상속세나 증여세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하니 작품의 수준은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제도 시행 이후 첫 사례가 2024년 10월에 나왔는데, 그때 세금 대신 납부돼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미술품이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쩡판즈(Zeng Fanzhi, 1964~)가 그린 같은 제목의 초상화 두 점은 쩡판즈 인물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커다란 눈과 허물어진 신체 표현이 그것이다. 몸에 비해 크게 과장된 손과 머리, 눈을 가진 두 사람의 머리에선 연기 같은 게 피어오르는 듯하고, 두 다리는 서서히 녹아내리며 소멸하는 모습이다. 인간 내면의 본질을 보여주려는 장치다.
이번에 선보이는 해외 작가 33명의 미술품 44점 가운데 아시아 작품은 중국 작가 아이 웨이웨이와 쩡판즈의 작품뿐이다. 여기에 중남미 출신 2명을 뺀 나머지, 즉 29명의 작품 39점이 모두 유럽과 미국 작가들의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근대 이후 세계 미술의 흐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준으로 그전까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이, 그 뒤로는 미국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 출신의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hero, 1932~2023)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듯 풍만한 신체 표현으로 국내에서도 친숙한 화가다. 보테로는 거장들의 작품 속 인물을 풍만한 형태로 변형해 원작이 지닌 권위와 위엄을 해체하고 서구 중심의 미술사와 문화적 기준, 고정된 미적 기준에 도전하며 다양성을 추구했다. 또한, 자신의 고국이 속한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와 역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림을 보자. 두 사람이 춤을 춘다. 표정과 자세를 보면 흥에 넘치는 모습이다. 바닥에는 빈 술병과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새 담배를 입에 문 남자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이 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이다. 현재를 즐기라고! 보테로의 그림은 근엄하지 않아서 친근감을 준다. 다시, 문제는 ‘다양성’이다. 미술관 컬렉션에도 다양성이 필요하다.
카미유 피사로의 <퐁투아즈 곡물 시장>(1893),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1917-1918),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 호안 미로의 <회화>(1953), 마르크 샤갈의 <결혼 꽃다발>(1977-1978)은 모두 이건희컬렉션이다. 이런 세계적인 화가들의 귀한 작품을 우리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복인가.
미니멀리즘, 팝아트, 추상표현주의, 극사실주의 등 세계 미술의 중심이 된 미국에서 새롭게 일어난 추상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볼 수 있다. 도널드 저드의 <무제>(1980), 앤디 워홀의 <자화상>(1985), 프랭크 스텔라의 <설교단 1989>(1989), 샘 프란시스의 <정열>(1990), 톰 위셀만의 <컨트리 누드>(1992) 등이 그것이다.
특히 샘 프란시스의 <정열>은 물감을 떨어뜨리는 드리핑(dripping) 기법과 감각적인 색채의 조화가 어우러져 추상표현주의의 한 성취를 보여주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이 전시에서 나의 ‘원 픽’이다.
그런가 하면 오랜 미술적 전통을 바탕으로 각국의 고유한 색깔을 만들어 나간 유럽 미술의 다양한 면모도 만날 수 있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에트루리아인>(1976), A R 펭크의 <체계화 III>(1982), 외르크 임멘도르프의 <독일을 바로잡다(전장에의 복귀)>(1983), 빅토르 바사렐리의 <게자>(1983),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동양여자>(1987), 안젤름 키퍼의 <멜랑콜리아>(2004),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얼음 위를 걷는 사람들>(2021-2022). 이 얼마나 훌륭한 컬렉션인가.
그중에서도 빅토르 바사렐리는 특히 더 반갑다. 헝가리 국립 부다페스트 미술관과 바자렐리 미술관이 소장한 바자렐리의 작품 200여 점을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회 <빅토르 바자렐리: 반응하는 눈>(2023.12.21.~2024.4.21.)이 지난해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다. 이 훌륭한 전시를 통해 빅토르 바자렐리라는 뛰어난 예술가를 알게 됐다. 그러고 나니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우리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좋은 해외 작품을 우리 국립미술관 전시로 만나기는 쉽지 않다. 국립미술관의 역사가 매우 짧은 데다 ‘국립’이 갖는 근본적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동안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여 해외의 좋은 미술품을 한두 점씩 꾸준히 사 모으고, 이건희컬렉션이 몹시도 허전했던 국립미술관의 해외 미술품 리스트를 상당 부분 채워줌으로써 조금씩 구색을 갖춰가는 것 같아 반갑다.
다만, 이 전시를 과천이 아닌 서울에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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