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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에서 선들이 춤을 추네…강경구의 풍경 그리기

석기자미술관(231) 강경구 개인전 《월인천강》

by 김석

그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가 아는 그림, 그리고 내가 모르는 그림.


강경구의 그림은 내가 모르는 그림이었다. 일차적으로야 그동안 뾰족한 인연이 없었던 탓이겠지만, 나의 현대미술 공부가 그만큼 부족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 풍경에 관한 한 강경구는 동시대 한국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강경구의 ‘서울별곡’ 연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현대 한국화가의 작업으로는 단연 으뜸이다.


20251112_111752.jpg 강경구, <칠족령 1>, 캔버스에 아크릴, 91×73cm, 2025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해 창덕궁 앞 나마갤러리에서 열린 강경구의 개인전 《바람의 시간》(2024.10.2.~10.22)을 보러 가자는 어느 분의 제안을 ‘어떤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후회막급이다. 헥사곤 출판사에서 낸 강경구의 화집을 사서 요리 보고 조리 보고 할 때마다 전시를 못 본 아쉬움이 되살아나 매번 입맛을 다신다.


그래서 기다렸다. 다음 전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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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강경구 작가가 페이스북으로 개인전 소식을 알렸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밀린 숙제를 해결하는 기분으로 신분당선 열차를 타고 청계산 입구로 향한다. 서울살이 40년 만에 처음 가본 동네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호젓한 전원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겹기만 한 주택가 골목을 걷다 보니 마음이 절로 상쾌해진다.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주택가 한쪽에 서 있는 작고 예쁜 갤러리를 드디어 찾았다. 지난해 청계산 아랫마을에 문을 연 아트 스페이스 X(Art SpaceX)다. 강경구 작가 작업실이 근처에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전시를 연 까닭을 알겠다.


전시는 강원도 영월 동강 연포마을 풍경 작업이 중심을 이룬다. 작가 노트를 읽어보자.


20251112_111244.jpg 강경구, <연포마을 1>, 캔버스에 아크릴, 90×200cm, 2025



여기는 동강 연포마을.

10곡 병풍처럼 끝없이 이어진 절벽들, 모든 부스러기들은 다 거두고 날카로운 골기만 성성하다.

그 밑동의 투명한 옥색 물길들은 허리를 꺾어가며 계곡을 휘감는다.

하늘과 땅, 물과 바람이 한데 섞여 끝없이 돌아가는 곳이다.


초봄, 잔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강변.

이 좁은 계곡에서는 졸졸거리는 물소리, 귓가의 바람 소리,

작은 발자국 소리 하나도 우렁우렁 큰 메아리로 돌아와 귓전을 때린다.

거인의 저벅거림같은 환청속으로 모든 감각이 집중된다.


20251112_111057.jpg 강경구, <영월 4>, <영월 5>, <영월 1>, 캔버스에 아크릴, 91×73cm, 2025



스케치북을 펼친다.

우로 좌로 위로 아래로 마구 선들을 긋는다.

저 앞의 풍경 어디에도 없는 선들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춘다.

사방의 환청들에 홀린 전혀 다른 세계의 춤사위다.


하루에도 세 번이나 달이 뜬다는 이곳.

여기에는 분명 또 다른 세계를 향한 비밀스럽고 투명한 작은 통로가 있다.


20251112_111406.jpg 강경구, <뼝대 1>, <뼝대 2>, <뼝대 3>, <뼝대 4>, 캔버스에 아크릴, 145×145cm, 2025



1층과 지하 전시장, 2층 카페에 작품이 걸렸다. 딱 한 점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 모두 강경구 작가가 올해 완성한 신작이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지하에 걸린 <뼝대>라는 제목의 4점 연작이다. 뼝대는 바위로 이뤄진 높고 큰 낭떠러지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다. 산을 굽이치며 휘돌아 흐르는 동강 옆으로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명승이다.


힘찬 붓질로 그어 내린 굵직한 선들이 바위의 뼈대를 이룬다. 거칠 것이 없는 선이다. 다른 표정을 가진 그림 네 폭이 서로 공명하며 깎아 지른 암벽에 새겨진 시간의 더께를 말없이 보여준다. 단단하고 묵직하다. 나는 강경구 그림의 그런 면이 좋다. 형상에서 벗어나 심상을 이룬 풍경. 자유롭고 활달한 필치. 강경구 그림이 가진 매력이다.


20251112_111202.jpg 강경구, <영월 3>, 캔버스에 아크릴, 91×73cm, 2025



전시장에 걸린 그림 가운데 유독 <영월 3>이란 작품에 끌린다. 일정한 길이와 두께의 선들이 마치 물고기 떼처럼 산을 기어오른다. 영월의 산을 초록과 노랑, 갈색이라는 세 가지 색깔의 조합으로 풀어내면서 능선을 따라 뻗은 숲에 수직의 운동감을 줘 산이 품은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이 노란 선으로 반짝인다.


20251112_111321.jpg 강경구, <연포마을 2>, 캔버스에 아크릴, 90×200cm,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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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한 그림 한쪽에 뜬금없이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건물 하나를 쓱 그려 넣은 걸 보고 웃음이 났다. 잘 생각해 보면 저 건물이 있고 없음이 화면에 얼마나 큰 차이를 불러오는지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장난스럽게도 느껴지는 저런 여유가 나는 좋다. 연포마을에 가서 저 커다란 암벽 앞에 서면 그림 속 건물이 실제로 보일까. 알 수 없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그런 재미가 그림 안에 있다.


20251112_111850.jpg (좌) 강경구, <미사리> (우) 강경구, <청계산>, 한지에 아크릴, 47×63cm, 2025



1층에 미사리와 청계산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전시를 둘러본 뒤 옥상으로 올라가면 청계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계산에 얽힌 두 가지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20여 년 전, 직장 동료들과 함께 주말에 청계산을 오른 적이 있다. 그때는 선후배 동료들이 어울려 주말 산행을 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문화다. 또 하나는 한겨울에 취재차 촬영팀과 함께 청계산 정상까지 올랐던 일이다. 지금이야 추억이지만,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청계산이 가을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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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정보

제목: 강경구 개인전 《월인천강》

기간: 2025년 11월 4일(화)~11월 30일(일)

장소: 아트 스페이스 X (서울시 서초구 신원동 253-15)

문의: 02-6241-8740 / @artspacex_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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