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원 수업에서 접한 마리타 스터르큰의 『영상문화의 이해』 2장을 읽고 남긴 자유 리뷰 중 일부입니다.
아비투스-옴니보어 논쟁은 문화연구에서 퍽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논쟁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선 부르디외는 특정 계급 내에 속하는 구성원들은 동일한 문화적 취향이나 행동 양식을 갖는데 이것이 취향 문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나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취향은 실은 내가 속한 계급의 취향이라는 구조주의적 관점의 접근인 것이다. 피터슨은 이에 반박하여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옴니보어적 향유가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부르디외의 입장이 다소 약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선인 듯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과연 이 두명의 논리가 정말로 타당하며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혹은 새로운 이론적 구상이 가능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현대 사회에 있어 구체적 개개인들의 취향을 극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공간적 단서가 곧 ‘유튜브’라고 생각한다. 얼핏 보면 유튜브는 개인의 경험과 자유의지에 따른 취향의 선택이 수행되며, 또한 유튜브 역시 그에 화답하여 주체의 선택으로 도배된 영상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이 가능해진다. 과연 유튜브에 ‘구조’는 부재하는가? 그 누구라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옴니보어론이 기각되는 동시에,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론이 새로이 수정될 여지가 마련된다. 필자가 진단하기에 부르디외의 이론적 한계는 결국 구분의 인식과 기준이 ‘전통적인 개념의 계급’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날의 구분짓기는 계급적 방식으로 수행되는가? 계급론은 여전히 충분히 효력을 발휘하지만, 그럼에도 현대인의 뇌를 직접 들여다보면 '계급적 자아'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그러므로 계급을 현대적 맥락으로 재설계하거나 혹은 계급이 아닌 그 외의 구조적 기준이 제시되면 충분히 그의 이론을 수정할 수 있지 않을까.
낙산공원 성곽길의 가을풍경
부르디외의 논의를 필자의 임의(구조/개인)대로 수정하여 현대사회의 단면을 진단해보자. 우선 구조의 측면에서 과거와 비교해서 오늘날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크게 주목하는 것은 '플랫폼 사회의 등장'이다. 유튜브, 넷플릭스, sns 등과 같이 거대한 문화적 교류가 오가는 장(場)으로서의 '플랫폼'은 다양한 '차이'들을 수렴하여 하나의 단일한 '창구'로 포섭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문화적 혼성화를 일궈낸다. 그러다보니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플랫폼 사회는 타자를 알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너무나도 쉽게 체험하고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전처럼 구분짓기로 활용되었던 문화적 경계들은 상당부분 해체되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인 듯 보인다. 그러므로 ‘구조’는 부르디외의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로 존재하며, 아울러 다른 양상으로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해야 할 것이다. 연구가 부족하여 자세히 작성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이 부분과 관련하여서는 최근의 인터넷 담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와 대조적으로 개인들, 즉 현대적 주체들은 자신들의 누적된 경험과 취향, 선호에 따라 자유롭게 자리를 옮긴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의 현대적 주체는 과거의 글에도 언급한 것처럼 노마드적 인간이라고 하겠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구조 속에서도 ‘구분짓기’의 행위가 여전히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다만 구조의 양상이 이전과 본질적으로 달라졌듯이, 구분짓기의 양상 역시 이전과 전혀 다른 맥락에서 수행되는 듯 보인다. 예컨대 ‘취미’에서는 헬창, 격빠, 뮤덕, 집사, 컴덕, 밀덕 등을 자처하거나, 혹은 스스로 스트리머의 팬(보겸-가조쿠, 우왁굳-팬치,... )을 자처하는 형태로 자발적 구분짓기를 수행한다. 그러나 이 구분짓기는 이전처럼 집단과 집단을 분리시키는 단절의 맥락으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수행된다. 즉 타자와 구분할 수 있는 전통적인 맥락으로서의 구분은 거의 무화(無化)되었으며, 오히려 오늘날의 경계는 해당 취미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상과 정체성을 발화/호명하는 능동적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아비투스론을 수정해볼 여지가 존재하지 않을까. 계급적 구분짓기가 다소 시대적으로 뒤쳐지는 이야기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아비투스론은 지금도 여전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플랫폼 사회에 속하는 집단과 집단 구성원의 정체성을 특정하는 구분짓기의 방식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가를 살펴보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