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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atre Romance May 25. 2021

사랑에 빠진 얼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캐나다에서 서버로 일할 때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크게 소리쳐 "여기요!"를 외치거나 간단하게 버튼 하나로 직원을 부를 수 있는 한국과 다르게 그곳에서는 직원이 직접 지속적으로 손님의 상황을 살펴야 했다. 손님에게 따로 알러지는 없는지, 어떻게 음식을 받고 싶은지, 서빙을 한 이후에도 음식 맛은 어떤지,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등 말이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미리 준비하고, 알고, 다가가는 게 이곳에서의 '서비스'이고 더 많은 '팁'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이다. 이런 이유로 식사를 하는 테이블을 지속적으로 살펴보는 게 하루의 일과가 되었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나로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자체가 조금은 고역이고, 어쩐지 모든 게 외롭게 느껴졌지만, 우선 내가 선택한 곳에서 선택한 일이었으니 어쩔 도리는 없었다.


 손님들 테이블을 살피다 보면 사랑에 빠진 얼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아직도 그날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손님이 웬일인지 꽤나 있었던 그날, 어떤 커플을 봤었다. 사실 한 명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잘 구분이 안 가는 외모여서 동성애자 커플이었는지 이성애자 커플이었는지 잘은 모르겠다만, 둘은 커플임에 확실했다. 딱히 나란히 앉는다던가 손을 잡는다거나 등의 스킨십을 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서로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서 꿀이 흐른다는 게 저런 건가 새삼 깨닫게 되는 눈동자였다. 정말 눈에서 꿀이 뚝뚝. 


멍하니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사랑에 빠졌었던 내 모습은 어땠을지 문득 궁금해졌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사랑에 빠진 내 모습이 어땠더라. 내가 저런 눈빛이 있긴 있었을까? 또 저런 얼굴과 눈빛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의심이 들 정도로 내 모습도, 상대방의 모습도 기억이 나지가 않았다. 되려 이상하게도 사무칠 정도로 아프고 시린 눈길만 기억이 났다. 무섭도록 차가웠던 눈빛. 너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공허하고 텅 빈 눈빛. 귀찮다는 표정들. 왜 그런 눈들은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고 몇 해 동안이나 나를 괴롭히는 건지 놀라울 정도로 그런 눈빛들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시간과 기억은 얄궂은 것이라 지나가는 계절처럼 어떤 것은 희미해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향수처럼 진하게 남기도 하는데 왜 진하게 잔향이 남아야 할 것들은 희미해지고, 지나가는 계절처럼 잊어야 할 것들은 뇌리에 남아버린 것일까. 


분명 나도 저런 모습이 있었을 텐데. 누군가를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그런 눈빛을 받아 본 그런 시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라는 인간이 점점 감정적으로 무뎌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감정적으로 울거나 웃거나 한 것이 언제인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한 가지에 푹 빠져서, 그 감정 자체에 푹 빠져서,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을 잊을 만큼 행복해하고 슬퍼했던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 그립다. 그런 시간들이. 그런 얼굴들이. 그런 마음들이. 


상처로 남은 그 눈빛들 때문에 나를 갉아먹고 싶지 않다. 나는 가벼운 마음과 가벼운 눈빛을 원하지 않는다. 진득하고 진지한 오래된 마음이 좋다. 켭켭이 쌓인 시간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표정들과 눈빛이 좋다. 그런 눈빛을, 그런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그 시간 속에서 내 눈빛을 신경 쓰고 내 눈을 바라보고 나에게 시간과 마음을 최우선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변하지 않을 사람이 좋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 어쩔 도리 없는 진실이라 해도 변하지 않으려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좋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람마저도 비루함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눈빛을 지닌 사람이 좋다. 상대방을 섬세하게 읽고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서로의 자긍심을 북돋아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사랑에 빠진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좋고 내 눈빛을 진솔하게 아무런 계산 없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랑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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