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우잉 국립 가오슝 예술센터
2023년 겨울, 대만 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가오슝에 방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ACC에서 주관하는 공연예술전문가 워크숍 참여자로 선정된 것. 9박 10일간 가오슝의 웨이우잉이라는 아트센터의 시설, 건축, 프로그램, 페스티벌 등을 깊게 살펴볼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대만의 주요 문화예술기관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워크숍이었다. 개인적으로 세계의 극장들을 방문하고 아카이빙 하는 <Theatre Romance>라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었기에 참여자로 선정되어 매우 기뻤다. 또한 주로 영미권, 유럽권의 극장들을 많이 방문하기는 했지만, 역시 아시아의 정체성을 가진 나로서는 아시아권의 시장과 문화, 극장에 대한 지식을 넓힐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전문적이고 알찬 프로그램에 모든 비용을 지원받아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독하고 시린 한국의 겨울 날씨를 피해 영상 30도를 웃도는 대만 남부의 아름다운 날씨까지 즐기며 9박 10일을 보냈다. 워크숍의 결과물로 가오슝에 위치한 아름다운 극장 웨이우잉에 대해 가장 먼저 소개한다.
웨이우잉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가오슝이라는 지역부터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대만은 한국의 1/3 정도의 크기의 섬나라로 지리적으로 세로로 긴 모양새를 띄고 있다. 북쪽에 위치한 타이페이가 우리나라로 비교해 보았을 때 서울 같은 수도라면, 대만 남부에 위치한 가오슝은 부산 같은 제2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바다와 인접하여 있어 부산과 같이 대만 최대 국제 항구 도시로도 알려져 있는데 가오슝에 가 보면 묘하게 두 도시의 분위기가 닮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후적으로는 위도 상 홍콩과 비슷한 선상에 있어 매우 온난한 아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다.
극장을 이야기하기 전에 가오슝의 지역성과 기후 등에 먼저 이야기 한 이유는 웨이우잉의 건축 디자인과 설계 때문이다. 웨이우잉의 디자인은 네덜란드 건축가 메카누건축에서 맡았는데, 디자인 전 가오슝 지역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했다고 한다. 이에 온난한 기후로 인해 가오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크고 울창한 반얀나무에서 영감을 얻어 외관을 디자인했고, 여기에 바다와 인접해 있는 가오슝의 습도와 염분을 견딜 수 있는 건축물로 짓기 위해 선박의 재료원인 철 등을 활용하여 파도처럼 출렁이는 듯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구조로 디자인했다. 이 때문에 하늘에서 찍은 웨이우잉의 사진을 보면 225m의 거대한 철판으로 만들어진 파도 모양의 지붕이 가장 눈에 띈다.
아트센터 주변은 매우 넓고 나무가 많은 공원이 있어 웨이우잉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형태다. 이 공원은 원래 군사 훈련 기지로 쓰이던 군부대였는데 가오슝 시민들을 위해 공원으로 조성된 뒤, 공원 공간 일부를 할당하여 웨이우잉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웨이우잉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 공원과 어우러져 있어 마치 공원 또한 극장의 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붕에서부터 시작되는 야외극장의 객석(혹은 무대가 될 수 있는 공간)은 절묘하게 공원과 이어져 내외부의 경계가 흐려져 있다.
웨이우잉은 사면에서 모두 접근 가능한 형태로 건축되었으며 건물의 안과 밖은 열린 공간으로 유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을 건축에 적용하여 1층은 사방으로 뚫려있는 형태인 것이다. 이 야외 공간은 반얀광장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24시간 내내 개방되어 있어 시민들은 아열대 기후의 무더운 여름과 태양을 피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실제로도 이 지붕 밑 공간에는 넉넉한 그늘이 있었고, 부드러운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왔다. 시민들은 이 밑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거리공연을 펼치고 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의 하르파 콘서트홀이나 오슬로 오페라하우스처럼 지역의 특색이나 정체성을 반영한 독특한 디자인의 건축물, 극장들을 동경해 왔는데 웨이우잉 또한 이러한 가오슝의 지역성, 정체성을 잘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 전, 먼저 극장 공간을 살펴보자. 나는 워크숍을 통해 오페라하우스의 백스테이지와 무대 리프트 내부를 투어 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엄청난 규모와 깔끔하게 정비된 시설들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특히 백스테이지의 휴식공간, 수유실, 장애인화장실, 가족화장실 등 아티스트와 스태프를 배려한 공간들 또한 매우 인상적이어서 국내 극장에도 도입되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공간들이 많았다.
더불어 웨이우잉의 공간에서 가장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바로 극장별로 시그니쳐 컬러를 적용했다는 점이다. 극장별로 다른 대표 색상을 지정해 극장의 객석 및 백스테이지의 이정표를 디자인했는데, 규모가 큰 아트센터에서 항상 방향을 못 찾고 길을 잃어버리는 나 같은 스태프에게 매우 적절하고 사려 깊은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웨이우잉은 공식적으로 4개의 실내극장과 1개의 야외극장이 있다. 우선 가장 큰 공간은 오페라 하우스다. 오페라 하우스는 주로 오페라, 무용, 연극, 뮤지컬 등을 선보일 수 있는 대규모 무대와 객석을 가진 공간이다. 총 2260석으로 구성된 객석은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되는 1층, 그리고 발코니를 보유한 2,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페라극장은 그 거대한 규모와 웅장함에 걸맞게 대표 색상을 붉은색을 사용했다.
콘서트홀은 독특한 빈야드 스타일이 차용된 공간이었다. 빈야드의 우아하지만 또 권위적인 느낌이 물씬 드는 이 공간은 금색을 시그니쳐 컬러로 사용해 더더욱 고급스럽게 보인다. 빈야드 스타일의 좌석 배치는 관객들이 지휘자와 연주자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친밀한 느낌으로 관람할 수 있게 한다. 더불어 이러한 좌석 배치는 자연스럽게 최적의 음향을 느낄 수 있다. 비교적 다른 해외의 유명한 빈야드 스타일의 콘서트홀보다는 규모가 작아 보였지만 그럼에도 약 2,000석 규모의 객석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웨이우잉의 콘서트홀은 파이프 오르간으로 또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100년 된 독일 제조사의 제품으로 요하네스 클라이스 오르골바우가 제조했다고 하는 이 파이프 오르간은 총 9,085개의 파이프로 구성되어 있어 대만에서 가장 큰 파이플 오르간이라 한다. 엄청난 크기와 개수로 관객을 압도하는 이 멋진 시설을 가오슝의 관객들에게 더더욱 널리 알리기 위해 파이프 오르간을 소개하는 연주 프로그램을 별도로 운영할 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들도 파이프 오르간 내부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로비 공간 중 일부를 벽이 아닌 유리로 마감해 관객들이 극장을 오가며 파이프 오르간을 볼 수 있게 했다.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이더라도 이 웅장하고 세밀한 파이프 오르간의 뒷면을 보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를 들어보고 싶을 것이다.
세 번째 극장은 연극과 무용 공연을 주로 상연하는 플레이하우스다. 오케스트라 피트가 있는 극장이지만 오케스트라 피트의 객석은 제거가 가능하여 객석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프로시니엄으로도, 객석을 제거하면 돌출형 무대로도 가능하게끔 설계되었다. 플레이하우스도 오페라하우스와 동일하게 전자동으로 운영 가능한 무대 리프트가 있었다. 플레이하우스의 객석은 푸른색 컬러를 사용했고 관객과 관객이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오케스트라 피트를 감싸는 듯한 느낌의 모양으로 배치되어 매우 포근하고 조화로운 느낌이었다. 오케스트라 피트 위의 객석까지 모두 다 사용하면 약 1,231석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꽤나 큰 규모의 극장이었다.
마지막 실내 공간인 리사이틀 홀은 웨이우잉에서 가장 작은 공간이다. 주로 실내악이나 독주회, 또는 기타 소규모 공연을 위한 공간이다. 디자인은 전통적인 슈박스를 약간 변형한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좌석 구역의 중앙선을 따라 짧은 칸막이 벽을 세워 정면 좌석에 직접적인 소리가 닿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리사이틀 홀의 객석은 모두 노란색으로 제작되었고 작은 공간과 매우 어울리는 편안한 색이었다. 이 공간은 전문 공연뿐만 아니라 관객 교육프로그램이나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들에 자주 활용된다고 한다.
웨이우잉의 야외공연장은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극장 2~3층 부분이 자연스럽게 공원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채꼴 모양으로 위로 솟은 형태의 아레나식 객석 덕분에 그리스 시대의 고대 극장처럼 느껴진다. 적은 관객을 수용하는 서커스 공연 등을 상연할 때는 기존의 객석을 사용하여 무대를 꾸미고, 여름에 진행되는 대형 야외 페스티벌이나 오페라 공연 등을 추진할 때는 객석 부분을 무대로 만들어 넓은 공원 공간에 관객들을 앉힌다고 한다. 일몰 시간에 이 야외극장에서 서커스 공연을 보며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나 너무나도 당연하게 행복해졌고, 여러모로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극장이 디자인되어 있어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 외의 실내 극장과 극장 사이에는 예술전문서적과 기념품을 구매할 수 있는 서점, 식음료를 구매할 수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다수 있어 공연을 즐기러 온 사람들은 여유로운 관람 전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모든 공간 투어는 프로덕션 디렉터인 Jack의 안내로 진행되었는데, 어쩜 이렇게 투어 진행이 세세하고 철저한지 투어 시간 내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극장 공간이 이렇게 섬세하고 계획적으로 설계되었으니, 직원들도 이 공간을 깊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워크숍을 위한 투어 외에도 일반 관객을 위한 여러 가지 투어 프로그램이 있으니 가오슝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꼭 참여해 보길 권한다.
이제 웨이우잉의 프로그램들을 살펴보자. 웨이우잉은 가오슝을 대표하는, 또 유일한 대형 종합아트센터인 만큼, 한 가지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Weiwuying Selected Programs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진행되는 기획 초청공연들이다. 대만 국내 아티스트들의 공연부터 전 세계의 유수한 공연들을 선정, 초청하고 있는데 프로그래밍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아시아와 영미권의 아트페스티벌이나 아트마켓에 직접 방문해 프로그램들을 신중하게 고른다고 하며 해당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1~3년 전에 라인업이 구성된다고 한다.
위와 같은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도 웨이우잉이 비교적 전문적인 층위의 무대예술만을 선보이는 것은 아니다. 가오슝의 시민들은 아직 비교적 타이베이의 관객층들만큼 그 충성도나 작품을 관람하는 수준이 매우 높은 상황은 아니라고 한다. 즉, 공연 장르를 깊게 알고 사랑하는 마니아층 보다는 일반 시민들의 1회성 관람이 많다는 뜻. 그런 탓에 음악, 무용, 연극, 오페라 등 기초예술 장르에서 더 나아가 서커스, 스탠드업코미디, 가족공연 등 다양한 층위의 공연장르를 선보이며 아직까지 공연예술에 장벽이 있는 웨이우잉 시민들을 위해 눈높이를 조금씩 낮춰가며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한다.
웨이우잉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바로 서커스 장르이다. 홈페이지 프로그램 카테고리를 살펴보면 서커스 장르가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타 다른 공연장들의 프로그램 카테고리에 음악, 무용, 연극 등의 카테고리만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행보다. 서커스 프로그램을 이렇게 다채롭게 구성하고 있는 이유도 아마 가오슝 시민들에게 있는 보이지 않는 문화 장벽을 조금씩 낮춰 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나는 워크숍에 참여하며 Weiwuying Circus Platform이라는 서커스 페스티벌의 공연들을 다수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페스티벌의 구성과 프로그래밍, 운영 등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야외에서 진행되는 30~40분 단위의 짤막한 서커스 공연들은 공원을 찾은 시민들에게 매우 즐거운 유희거리가 되었고, 그 외에 극장에서 진행되는 전문 서커스 단체들의 수준 높은 공연들도 매우 인상 깊었다. 나는 이 중 국내에도 내한 한 적 있는 Les 7 Doigts(세븐핑거스)의 <Passagers(여행자)>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이 공연을 포함하여 수준 높은 프로그래밍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야외에서 다수의 공연이 긴 기간 동안 진행되는 만큼 안전과 운영상의 애로사항 없이 추진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들이 눈에 보여 관람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흡족했으며 아이들을 위한 소소한 이벤트들도 곳곳에서 개최되고 있어 자연스럽게 예술과 극장에 스며들 수 있게 하는 최적의 프로그램이 아닌가 생각했다.
공연 프로그램 외에도 웨이우잉에는 다채로운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가오슝의 학교와 연계하여 진행되는 청소년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이나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가족단위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더 나아가 전문 예술인들을 위한 포럼이나 워크숍 또한 진행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전문 공연장 시설을 활용하는 교육 프로그램들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학생들이 교육을 통해 직접 이야기를 쓰고 연기를 준비하면 그 결과 발표를 전문 공연장에서 하는 식이다. 전문 공연장을 지역 회관처럼 쓰이고 있는 것처럼 보여 분명 아쉬운 지점들도 있겠으나, 장기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미래의 예술관객, 혹은 아티스트들이 발굴되는 현장일 수 있으니 마냥 부정적으로 보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나는 체계적으로 추진된 워크숍을 통해 극장의 겉과 속을 세세하게 볼 수 있었고, 덕분에 이 극장이 얼마나 세심하게 설계되었고 운영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워크숍 내내 벅차고 감동적인 마음이었다. 웨이우잉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정부 차원에서 극장 설립이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장의 건축 디자인부터 사소한 시설까지 극장을 이용할 사용자들을 사려 깊게 고려하고 배려해서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야외 공간인 반얀 플라자에서 서커스 공연을 볼 때 건물 천장 부분에 무대 세트나 조명을 달 수 있는 장치들이 극장을 지을 때부터 계획되어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질투심마저 느꼈다.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곳도 정부 추진 하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계획되어 있는데, 그 계획단계에서부터 아무것도 고려되지 않은 탁상공론식의 추진에 벌써 유감스러운 상황들을 많이 목격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극장은 한 나라의 문화예술의 수준을 보여 줄 수 있는 척도이며, 또 미래의 예술산업을 이끌어 나갈 매우 기초적인 장소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 곳이기에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은 말랑말랑하고 유연한 창의적 사고 아래에서 추진되고 설계되어야 하며, 그 어떤 곳보다 사용자가 주인이 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계획,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웨이우잉은 그런 지점에서 관객과 예술가,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주인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곳이었다. 웨이우잉을 중심으로 가오슝의 문화예술이 한층 더 발전하고, 또 우리는 조만간 세계 무대에서 웨이우잉이 배출한 아티스트, 무대들, 이야기들을 보고 들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