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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캥거루 Aug 11. 2021

알고 보니 내가 주황이었다?!

우리는 꼭 같은 길을 걸아야만 할까?

 이전 글에서 “당신은 특별하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만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내기 시작하면 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만약 과정에서 주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내 성향과 적성과 무관하게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여 그 길을 걸어가거나, 나만의 길을 개척하거나. 어떤 일이든 개척은 쉽지 않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삼림과 덤불을 헤쳐가야 한다. 그 말인 즉, 기존에 유지하던 속도와 편안함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방향 분간도 어렵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에 적잖은 용기도 필요하다. 도전은 젊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고들 한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과 익숙해진 것들이 많을수록 포기하는 선택이 어렵기 때문이다.


 ‘젊음’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이고 가변적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

1. 젊음은 상대적이다. 나이를 비교하여 누가 더 젊은 지를 알 수 있기에 젊음은 상대성을 띤다.  

2. 젊음은 절대적이다. 사실 완벽한 절대라고 볼 수는 없고 일시적 절대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사회적으로 정한 기준에 따라 ‘청년’을 정의하는 나이 기준이 있으니 어느 정도 절대성을 띤다고 볼 수 있겠다.

3. 젊음은 가변적이다. 마음가짐과 내면의 역동성에 따라 젊다고 할 수 있으니 젊음은 가변적이다.


 젊음. 청년. 청춘

 오늘은 젊음의 가변성에 대해 집중해보려 한다. 이를 잘 표현한 글이 있다. 교육학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사무엘 울만(1840~1924)이 78세의 나이에 지은 청춘(Youth)이라는 제목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아래는 그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닌
사람의 마음가짐을 뜻한다네.



청춘이란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리고 탁월한 정신력을 뜻한다네.
때로는 예순 살 노인이 스무 살 청년보다 더 청춘일 수 있다네.

세월이 흐른다고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는 것이라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새기지만
열정으로 채워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네.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의 상실이
우리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한다네.


 젊음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닌 의식의 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가변성이 주는 희망이 있지 않은가? ‘몇 년 전에 도전했더라면…’이라는 후회는 과감히 던져버리자. ‘더 이상 후회 남기지 않을 지금’이 바로 적기이며, 용기와 모험심으로 가득 찬 젊음을 들고서 전진하자.


 필자도 마음이 시들어가던 비슷한 경험이 있다. 어릴 적부터 과학이 좋았고 더욱이 생명공학 연구를 하시던 아버지를 보며 과학의 길을 꿈꿔왔다. 그리고 과학고등학교와 과학기술원을 거쳐 대학원까지, 오랜 기간 과학의 길을 걸었다. 분명 내게 과학은 마음이 설레고 가슴 뛰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교육이 주는 괴리와 치열한 경쟁 속에 지쳐서였을까? 내가 도달한 그곳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실적 중시의 교수 평가 시스템. 그로 인한 압박은 고스란히 대학원생의 몫이었다. 해보고 싶었던 흥미로운 주제로 연구를 하고 계시다면 축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흥미가 덜하더라도 끌어주는 박사과정 사수가 있는 것 또한 축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먹히는’ 연구 주제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흘렀다. 내가 연구하던 소재 합성 분야는 다른 논문에서 유의미한 무언가를 발표하면, 소재만 변경하여 유사한 시도로 논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손쉽게 주제를 잡고 선점할 수 있는 일종의 지름길인 셈이다. 이런 접근 방식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이 과정 중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고, 누군가 응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기도 하니까. 다만, 내게는 ‘과학에 대한 흥미’라는 본질을 잃은 부질없는 행위로 느껴졌다. ‘내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념으로 긴 터널을 지나왔으나, 대학원에서조차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느낀 허탈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행복’을 좇기 시작했다. ‘해온 게 있으니 하던 대로(路;길로)’에서 벗어나 ‘지금 내가 원하는 대로’로 방향을 선회했다. 편한 길을 버리고 왜 고생길을 택하냐는 주변의 말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이기에 나를 흔들기에 충분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중요치 않았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삶을 살아야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훗날 있을 내 아이에게도 떳떳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지금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무엇이고 특별히 어떤 것에 마음이 뛰는지’ 기존에 알던 ‘나’를 지우고 다시 ‘지금의 나’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어렴풋이 느껴오던 것을 깨달았는데, 나는 파랑이 아니라 주황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스타트업에서 PM으로 일하고 있다. 어릴 땐 IT업계에서 기획자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잘할 수 있고 앞으로 내가 가슴 설렐 일들을 위해 나의 길을 걸어 나가고 있다. 과학의 길을 떠난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지금도 과학의 길을 걷고 있다. 대신 내가 더 즐겁고 행복하고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걷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굳어져버릴 줄 알았던 과학에 대한 흥미(만물의 신비에 대한 탐구심)가 다시금 샘솟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전보다 ‘과학’의 범주를 더욱 넓게 바라보고 있다.


그대 가슴속에 안테나가 무너지고
정신이 냉소와 비관의 눈으로 덮일 때
그대가 비록 스무 살이라고 하더라도 노인이겠지만,

가슴속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희망을 품고 있는 한
그대가 비록 여든 살이라도 죽을 때까지 청춘이라네.


 사무엘 울만이 시의 후반부에서 말하듯,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나 청년일 수 있다. 그러니 냉소와 비관으로 반복의 일상을 살고 있는 그대여, 젊음을 되찾길 바란다. 그리고 용기와 기백으로 무장한 그대여, 당신의 행복과 무한한 영감을 위한 도전을 주저하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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