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할때 처형과 체제 이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는데 나는 몰랐다. 눈치 빠르면 알았을라나...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가끔 큰 동서가 같이 식구들 가는 미리 계획한 여행이 회사일로 바빠서 못 가서 미안하다 해서 조금 의아 했던 정도 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이혼이 정해 지고 나서 들었는데 갑자기 설마 하면서 많이 놀랐었다. 더구나 아래 위로 동서들과 나이도, 일하는 직장도 그리고 비슷하게 학교들을 뉴욕 근교에서 나와서 공유하는 것들이 많았다. 더구나 일년 차로 결혼들로 만난 사이어서. 우리에 삼대삼.
한해 간격으로 결혼에 서른 살 갇너머같이 식구가 된 세 남자들 끼리 재미는 꽤 있었다. 비슷한 마우스 키보드 잡고 속한 조직에 대한 고충과 소소한 일과, 그리고 유학,가족 이민 정착 이야기. 우리들에 부모님들과 형제들에 대한 대화와만남들이 결혼이 주는 큰 덤으로 나름 인생이 한껏 넓어진 듯한.
이혼...다들 이유도 있겠고, 깊이 따로 이야기 하지 않았고, 아래 위 동서들과도 서로에 의견을 존중해 주며 후에도 종종 연락도 하면서 지내곤 했다. 다들 건실하게 자기에 속한 회사에서 열심히들 바쁘게 살고 있었고.
처제야 아이가 없고 알아서 더 편한 모습이었고, 다만 처형에 한참 귀여운 유치원 나이에 조카가 아버지와 있지 않게 되는게 좀 마음에 걸렸다. 부모님들이야 서로 이유가 있지만 어린 아들에게는 그 '아버지'라는 존재에 무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한 나만에 생각에서.
하지만 서로 살다 보면 꼭 나누지 못할 사정이 있겠고, 그리고 서른 몇살에 나이면 다들 알아서 더 좋은 바향이려니, 좋은 쪽으로 우선 생각 한 것 도 있고 그리고 나 역시 어린 딸애, 뭐 해도 이쁜, 쫒아 다니느라, 그리고 그때가 한참 2008년 subprime 사태 몇년 뒤여서, 바뀌어 가는 회사 projects들에다가, 한참 굳건하던 server들에서 Cloud computing 모든게 옮겨가는데 쫒아 가는라 남자들 끼리 종종 연락하면서, 정신 없게 몇년 지난듯 싶다. 조카는 초등학교에서 중학생으로 고등학생으로, 딸 애는 유치원에서 초딩학생으로, 애들이 바쁘면 쫒아 다니느라 시간도 빨리 간다.
다시 여름
다음해 여름이 다시 오고, 장인 장모님도 한국에서 오셔서 매년 그렇듯이 우리 집에서 여름 방학동안 지내셨다. 동서에게 특별히 어떻게 장인께 말을 했는지 따로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장인 어른이 한꺼 번에 두 사위가 없어졌으니 아무 언급이 없었지만 많이 깊이 상심 했으리라. 아무 말씀 없던것에 그냥 지나쳤는지 지금도 후회는 아니지만 뭔지 모르게 죄송한 생각도 듣다. 달라 지지 않았을 망정,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났다는 것이.
뉴저지 근교 한두시간 거리로 Hudson river와 Catskill Mountains 으로 하루 즐기기 좋은 한적한 강, 호수에 좋은 공원들이 많다. 그 해 한 주말에 장인 장모 모시고 한시간 거리에 호수가로 BBQ 겸 해서 화창한 여름 날씨에 피크닉을 가기로 했다. 작년 일은 이제 뒤로 하고.
그 주말에 향한 공원은 Catskill 쪽에 가는 길에 한시간 남짖거리에 Rockland State Park, NY. 유명한 이름 있는 호수도 아니고, 그저 동네에 큰 공원 같은, 하지만 사람들도 별로 없고, 한적하니 식구들과 고기 구으면서 넉넉히 해가 저물어 가기는 딱이다.
한시간 거리로 다들 움직이기 부담도 없고 넓은 공원에, 호수, 산책 길들이 있고, 어린 딸하고 조카 애들 놀기도 안전해서 그 주말은 Rockland State Park 으로 향했다.
이자리다.
호수가 바로 앞 테이블.
호수가에 제일 가까운 테이블이 늘 명당이다. 파킹장과 제일 먼.
다행히 테이블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아서 와이프가 부모님 먼저 모시고 딸 애 하고 가벼운 짐들을 가지고 가서 테이블을 차지 하고 앉았고, 처형과 처제는 조카 데리고 자전거, 장난감들을 챙겨서 뒤이어 호수가로 향했다.
나는 뒤에 이어 차에서 짐들을 내려 놓았다. 비록 한끼이지만 BBQ 준비물들은 꽤 된다. 우선 바베큐에 심장인 고기와 불 - charcoal bag. Folding chair들, ice box,,, 몇번은 왔다 갔다 해야겠지만, 꽤 되는 거리에 귀찮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한번에 할수 있을것도 같고... 늘 잔소리 듣는 모든 남자들에 '룰' 따라서 - 일단 메뉴얼 안 읽기, 뭐든 무리해서 한번에 다 하기...etc.
우선 folding chair들을 어깨에 메고, Charcoal bag 한손에, 끌 수 있는 아이스 박스는 다른 손에, 그 위에 짐 좀 올리고.
*참고로 이 바베큐 그릴 삭탄에 대명사인 Kingsford charcoal은 100년전 1920년대 Ford 자동차 회사에서 그당시에는 차 재료로 많이 쓰던 나무 재료에서 어마하게 버리는 조각, 톱밥을 이용해 만든 석탄을 상품화 해서 미국 국민에 바베큐를 상징하는 회사가 되었단다.* https://en.wikipedia.org/wiki/Kingsford_(charcoal)
양손에 들고, 끌고, 어깨에 주렁주렁 지고 호수가로 헉헉 걸어 가면서 위아래 동서를 없어 진게 갑자기 확~ 느껴 졌다.
여거 우리 셋이 들면 그냥 웃으면서 서로 들고 가면 되는 건데.없어진 "맨 파워"...
그림자에 넓이
15년 전 한 주말에 피크닉인데
연속극이나 영화에 명절이나 때가 되어 나누는 동서들에 술 한잔 하는 장면에서, 조런거 좀 해 보고 싶은.
이제 가끔 갈 일 들이 있는 장례식장 에서 식구들이 같이 나누는 슬픔에서,
내가 결혼 하고 나가서 식구들이 줄어 든게 의아해 하시는 연로하신 아버지에 지나가는 말씀에
아직도 혼자 드는 무게가 축 느껴 진다.
오래전 고등학교때 말썽 부렸던 나에게 한마디 해 주시던 이모부 - 아버지에 큰 동서, 고려대학교 국문과교수님이셨다 - 박병채 교수님. 그때 친구하고 어울려 잠시 학교 밖에 재미에 푹 빠져서 있을때, 화난 어머니가 형부인, 이모부에게 끌려 갔던 안암동 이모부 이층에 서재에서. 파이프 담배와
"책 재미도 한번 볼 나이인데...." 한묵직한 인생에 GPS같은 나에 십대을 잡아 준 "이모부" 라는
식구의존재감 무게.
뭔지는 모르겠어도, 애는 모르고 자란 그 무게. 이제 대학생이 된 딸에게 정리해서 깊게 전해줘야 한다는,뭔가 갚아 줘야 하는것 같은, 책임감도 있었다.
떠나는 사람은 새로운 길에 바쁘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빈 자리 생각나는 것 처럼.
최선에 결정으로 잘 가고 있는 서로에 길 뒤에,
그윽하게 잠시 아침에 품고 있다가
스르륵 햇빛에 사라진안개처럼사라진,
장인에게는 사위들과,
나에게는 동서들과,
딸에는 이모부들과,
와이프에 재부들.
이제는 사진 속에만 있는 식구들.
살다보면 없어지는 존재가 더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서도.
그날 공원에서 BBQ 하느라 파킹장에서혼자 들은 짐에 무게는 시간이 지나서
오십대 이면
잊어 져서 가벼워 질 줄 알았는데.
집안에 투 스라이크, 안타 하나
2024년 현재
6회말 쯤...일까
와이프 하고 나는 일루 쯤 나가 있는데
앞으로도 열심히 공보고 잘 뛰어야지.
드리워진 이혼그림자는
긴 시간이 지나면서도
넓고 짙어 지나싶다.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Milan Kund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