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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 Sep 02. 2021

'주말 살림' 하는 남편, 이런 노후 준비도 있습니다

일방적인 돌봄 노동에서 벗어난 우리 부부, 몸도 마음도 더 건강해졌습니다

완경이 가까워지니 몸의 소리가 더 잘 들린다. 몸의 마디마디가 다 삐그덕거린다. 손가락, 발가락, 무릎, 고관절, 팔꿈치, 어깨... 많이 아픈 건 아니지만, 아리아리하게 신경에 거슬린다.


이런 사정으로 책과 영화를 뒤적이며 나이듦, 돌봄, 그리고 죽음에 대해 저절로 탐색하게 되더라.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고 싶은가. 어떻게 죽고 싶은가. 그리고 생각한다. 혼자 움직이기 어려워졌을 때, 남편의 돌봄을 받을 수 있을까.



꿈을 꾸며 신음하는 아내


몇 년 전 마종기 시인의 <아내의 잠>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시에 등장하는 아내에게 나 자신을 대입하며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밤에 문득 잠 깨어
옆에 누운 이십 년 동안의 아내,
작게 우는 잠꼬대를 듣는다.
간간이 신음 소리도 들린다
불을 켜지 않은 세상이 더 잘 보인다.

멀리서 들으면 우리들 사는 소리가
결국 모두 신음 소리인지도 모르지.
(중략)

마종기 <아내의 잠> 중에서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어난 시인은 20년 침식을 같이 했던 아내의 잠꼬대를 듣는다.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 소리 같기도 하다. 그는 아내의 잠꼬대 소리를 '우리들 사는 소리', 즉 모두의 신음 소리로 치환한다. 사람마다 시기마다 그 강도와 밀도가 다를진대, 그는 아내의 신음 소리를 도매금으로 넘기고 있는 것 같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는 아내에게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길래, 그렇게 신음소리를 내었느냐'라고, '무슨 상심한 일이 있었느냐'라고 물어봤을까.


나도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다. 우리는 남들 보기에 별 문제없는 사이였다. 주말이면 항상 붙어서 장을 보러 다녔다. 그가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저녁 설거지를 도맡아서 하고, 주말이면 화장실 청소도 했다.


술 먹고 주정을 부리나, 담배로 건강을 해치나, 더 이상 무얼 바랄까.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동네에서 가장 사이좋은 잉꼬부부라고. 나의 의식은 그것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 맞아! 내 남편만한 사람 없지. 이만하면 결혼 잘한 거지, 뭐.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달랐다. 꿈속에서 그는 나를 버려두고 어디론가 가버린다. 꿈속 배경은 일본의 낯선 어느 기차역이다. 나는 어떤 열차를 타야 할지 애를 태우기도 하고,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혹은 어떻게 갈아타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다.


왜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달랐던 걸까. 20년 이상 침식을 같이 해도 그가 남의 편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뭘까. 정서적 교류가 없었던 때문일까. 맞다! 나는 그를 살피고 돌봤던 반면, 그는 나를 돌보지 않았다.



아내의 감정을 살피며 짐을 덜어주는 남편


나는 부모님 사는 모습을 보고, 결혼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량처럼 밖으로만 나돌아 다니니, 어머니가 농사일부터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함께 아버지의 무책임이 싫었다.


그런데 옆지기는 나의 아버지랑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 아닌가. 돈도 벌어오고, 집안일도 도와주고, 땡잡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부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그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가 보다.


남편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조곤조곤 나의 감정을 털어놓은 적도 없다. 속에서 삭힌 것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누구보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만큼은 행복하지 않았다.


난 이런 상황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솔직했다. 그 당시 갑상선 자극 호르몬 수치가 100 mIU/L을 기록했다. 참고로 정상 수치는 0.5~5.5 mIU/L다. 칫솔질도 버거웠다. 집안일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할 뿐이었다. 멸치국물 내는 것조차 너~무 귀찮았다는 게 믿어지는가.


드디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그동안 쌓인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주부 파업을 선언했다. 음... 이제는 좀 살만해졌다. 약의 도움 없이 갑상선 자극 호르몬 수치도 20대로 떨어지고.


그는 고단해졌으려나. 주말에는 그가 살림을 도맡아서 한다. 빵과 커피와 과일로 아침 식사를 하면 그의 바쁜 하루가 시작된다. 혼자서 일주일치 장을 보고, 그것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점심을 준비하고, 조금 있다 저녁을 준비하고, 틈틈이 일주일치 빨래를 돌리고 건조시켜 개기까지... 덕분에 나의 주말은 참 여유롭다.


▲  옆지기가 담근 열무김치와 양파 절임. 저장 식품으로 시간과 비용과 품을 절약하는 살림의 기술!ⓒ 박미연


주말 살림을 그에게 맡기기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집안일 하는 것을 앉아서 지켜보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내가 나서서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죄스러운 듯, 미안한 듯, 고마운 듯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평안한 마음으로 그의 가사 돌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노후를 그와 함께 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날이 오면, 선택의 여지없이 요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요즈음은 옆지기가 나를 돌봐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물론 옆지기는 자기가 돌봐주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일! 어찌 됐든, 옆지기의 주말 돌봄 노동은 그 자신의 노후 준비로도 안성맞춤 아닌가.


아, 지금은 그가 나를 버려두고 어디론가 휑! 가버리는 꿈은 더 이상 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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