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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 Jan 27. 2023

암이 일깨워 주었다, 내가 얼마나 삶을 사랑하는지

삶이 블랙코미디의 연속일지라도 닥치고 살고 싶다

"전에는 먼 수평선쯤에 머물던 죽음이 이제는 우리 집 거실에 들어와 머물고 있다."


사이먼 피츠모리스의 <어둠이 오기 전에>에 실린 글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혹은 죽음과 나와의 거리감에 대해 이것만큼 적절하게 묘사한 문장이 또 있을까.


얼마 전까지 나에게 죽음은 남의 일처럼 먼발치서 조망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암입니다!" 의사의 암 선고와 함께 죽음은 성큼 우리 집 거실에 들어와 불청객으로 머물고 있다.


죽음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죽음과 좀 더 친하게 지내야 되겠다는 생각에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렸다. 이때 <어둠이 오기 전에>의 저자 사이먼 피츠모리스(1973년~2017년)를 만났다.



삶의 기쁨, 감각의 모든 것 위에


그는 아일랜드 영화감독이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루게릭병 환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암환자이듯. 2008년 그는 루게릭병 진단과 함께 4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시곗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것,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절망과 두려움, 상실과 슬픔이 그의 삶의 언저리에 머문다. 하지만 그는 죽음에게 쉽사리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 삶에 대한 사랑과 의지로 어두움의 그림자를 지우며, 더욱 촘촘히 삶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행복에 전율한다.


암 진단 전, 나는 삶이 한여름의 엿가락처럼 늘어진다고 생각했다. 지루함, 무의미와 허무에 진저리가 났다. 이런 내게 암 선고는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번쩍 정신이 들게 한 사건이었다. 삶에 어리광을 부리며 나태함을 한껏 미화하는 사치 따위를 사라지게 만든.


작년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시간이었다. 피츠모리스만큼 절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암=죽음'이라는 공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십 권의 건강 서적을 독파하며 불안을 다독였다.


▲  당근의 단면. 자세히 보면 이보다 더 예쁠 순 없다. ⓒ 박미연


그리고 내 몸의 유한함을 실감하며 내 몸을 사랑하고 돌보기로 결심했다. 자연식물식과 산행을 병행하며 모든 감각을 열어 지금 이 순간을 살고자 했다. 다행히도 그 과정에서 삶의 즐거움을 길어 올릴 수 있었다. 삶의 기쁨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기쁨의 원천이었다.


도마 위에서 햇당근을 동글납작하게 썰다 보면, 오렌지 빛깔에 반하고, 꽃 같은 속살에 설레어 어느새 오도독오도독 씹고 있는 내가 있다. 당근의 진한 향이 싫다고 우리 집 막내처럼 당근을 골라냈었는데.


음! 몰랑몰랑해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달콤한 홍시는? 진한 콧물처럼 물컹물컹하다고 싫어했었지. 어느 날 참다래를 반으로 썰었을 때의 놀라움도 선명하다. 내 눈에 새겨진 것은 까만 무늬가 촘촘한 예쁜 꽃이었다.



죽음이 일깨워준 삶의 의미, 사랑


▲  레몬의 단면. 관심을 기울이면 세상은 사랑스러운 것들 천지다.  ⓒ 박미연


아일랜드에서는 루게릭병 환자에겐 인공호흡기를 연결하지 않는다고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삶을 연장한다. '왜 그렇게까지 살고 싶은가?' 자문하며 '진실한 사랑'이라고 자답한다.

       

아내에 대한 사랑. 아이들에 대한 사랑. 친구와 가족에 대한 사랑. 인생 전체에 대한 사랑. 내 사랑은 여전히 빛나고, 굴복하지 않으며, 깨지지 않는다. 나는 살고 싶다. - 113p <어둠이 오기 전에> 중에서.


암 이후 나는 '왜 살지?'라고 묻지 않는다. 닥치고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보다 삶을 더 사랑한다! "인생이 안겨주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려는 의지, 상실을 견디며 살아가려는 의지, 사랑을 품고 살아가려는 의지. 인생의 길을 찾으며,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의지." 이것이 암이 나에게 준 크나큰 선물이다.


일전에 옆지기가 큰 귤처럼 생긴 것(아마도 황금향)을 들고 퇴근했다. 누군가에게 받은 거란다. 어찌 되었든 푸근했다. 세 남자가 나누어 먹도록 일렀다.


그의 말. "어떻게 먹는지 몰라~" 나는 "귤처럼 까먹으면 돼~"라고 했다. 그는 내 말을 싸악 무시했다. 그 다음 말이 클라이맥스다. "칼로 잘라서 먹어야 되나?" 결국 내가 까서 그의 손에 쥐어주고 말았다.


삶은 이렇게 블랙코미디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사랑과 미움이 엇갈리며, 불안과 위로가 숨바꼭질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싶다. 죽음보다 이 모든 것이 더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옆지기의 아리송한 말과 행동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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