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습대로 살고 싶어

어디까지가 섹스이고, 어디서부터가 젠더인가

by 야생

<나의 사적인 여자 친구>는 한 남자가 한 여자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스크린 가득 누군가가 립스틱을 마르고, 마스카라를 하고, 볼터치를 하고, 귀걸이를 하고, 결혼반지를 낀다. 머리에는 화관까지. 그리고 웨딩 마치가 울려 퍼진다. 곧 신부가 입장할 듯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관속에 누워있다. 로라의 장례식이다. 클레어는 고별인사를 한다.


"로라는 평생의 절친이었고...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처음 만난 순간 사랑에 빠졌으니까요. 로라에게서 나를 봤고 내가 로라였죠. 그때 겨우 7살이었지만 영원히 함께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

어릴 때부터 그랬듯이...우린 약속했습니다. 로라, 우리 약속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약속은 지킬게. 내가 살아 있는 한 남아있는 너의 가족... 아기와 남편을 돌봐줄게."


처음 만난 순간 사랑에 빠졌으니까요!
로라에게서 나를 봤고, 내가 로라였죠!


로라의 죽음은 클레어에게 로라의 남편 데이빗과 부모님에 버금가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클레어는 삶의 의욕을 잃은 듯했다. 하지만 로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로라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다. 로라의 남편 데이빗이 로라의 옷을 입고, 아기 루시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클레어는 경악한다. 그리고 데이빗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다. 데이빗은 허둥지둥 클레어에게 고백 아닌 고백,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좀 오래됐어. 로라는 알고 있었고... 이것만은 로라가 너한테 숨겼을 거야.우리 결혼하기 전에 다 고백했거든. 난 여자 옷을 입고 싶다고, 가끔 여자 옷 입으면 짜릿하다고. 로라는 괜찮댔어. 한 가지만 부탁하더군. 다른 사람 앞에서만 그러지 말래."


나도 어쩔 수 없어!


데이빗은 클레어에게 "로라처럼 너도 날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클레어는 이 일이 있은 후, 잃어버렸던 생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죽은 로라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로라의 옷을 입은 데이빗과 놀이라도 하듯 즐기기까지 한다. 여장을 한 데이빗은 클레어만의 사적 여자 친구 '버지니아'다.


그런 행복감은 처음이었어!
새 세상이 열렸어!
간절했던 여자로서의 순간, 또 해보고 싶어!


그들은 어느 날 쇼핑을 나선다. 데이빗은 여자 복장이다. 태어나서 생전 처음으로 여자 옷을 입고 밖에 외출하는 것이다. 머리에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상반된 감정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는 대담해진다. 머리에 썼던 스카프를 풀고, 선글라스를 벗고 당당하게 걷는다. 극장에서는 남자의 유혹을 받기까지 한다. 남자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클레어에게 대답한다.


"못 믿겠지만 남자한테 흥분한 적 없어. 난 여자가 좋아. 그래서 여자로 보이고 싶은가 봐."

"남자랑은 안 해봤어?"

"한 번도."


그리고 그들은 클레어의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로라의 어린 시절 집을 방문한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 사실을 클레어의 남편이 알게 된다. 이에 클레어는 데이빗이 게이라고 둘러대며, 남편의 의심을 푼다. 그리고 데이빗에게는 그들만의 놀이를 그만하자고 한다. 데이빗은 힘들어한다.


"지난번 쇼핑한 후에 새 세상이 열렸어. 그런 행복감은 처음이었어. 간절했던 여자로서의 시간... 또 해보고 싶어."


막상 그만하자고 했지만, 클레어도 또다시 우울해진다. 이때 데이빗의 고백이다.


"테니스장에서...네가 말했잖아. 버지니아가 그립다고. 순간 나도 버지니아가 그리워지는 거야. 내가 아닌 척 살 수는 없어. 내 모습대로 살고 싶은데,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주는 건 너뿐이야."


테니스장에서 네가 말했잖아. 버지니아가 그립다고.


하지만 클레어는 데이빗이 생물학적으로 남자라는 사실을 극복하지 못한다. 데이빗이 "난 여자야"라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여자로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절망한 데이빗은 정신없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의식불명으로 깨어나지 못한다. 클레어는 로라를 잃었듯, 데이빗이 죽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데이빗에게 여자 옷을 입히면서 그를 깨우는 노래를 부른다.


"난생처음으로 내 생애 처음으로 여자가 된 거야. 여자가 된 거야. 너와 함께라면 나는 여자, 난 여자가 된 거야. 너만 있어주면 나는 여자"


여자가 된 거야, 여자가 된 거야!

여자가 좋고 여자가 되고 싶은 데이빗은 이 노래에 응답이라도 하듯,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클레어는 남편에게 데이빗을 이렇게 소개한다.


"내 친구야. 내 여자 친구 버지니아야. 루시의 엄마이고."


어디까지가 바꿀 수 없고, 어디서부터가 바꿀 수 있는 걸까


7년 후 버지니아와 클레어는 손을 잡고, 학교 앞에서 루시를 기다린다. 클레어는 배가 볼록하다. 이렇게 두 사람의 결말은 아름답다. 하지만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로 살기 원하는 데이빗을 여자 친구로 인정해가는 클레어! 그녀도 남자보다 여자를 더 좋아한 건가.


여기서 나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린다. 우에노 지즈코의 <여자들의 사상>이다. 나는 그동안 이성애만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여자로 태어난 사람은 여자답게, 남자로 태어난 사람은 남자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 <나의 사적인 여자 친구>가 그러하듯 우에노 지즈코의 <여자들의 사상>은 내게 파문을 일으킨다.


이성애란 제도이자 규범이며, 강제이자 억압이다. 이성애가 자연화되고 오랫동안 익숙하게 체득되어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묻지않았을 뿐이다.........어디까지가 섹스이고 어디서부터가 젠더인지, 즉 어디까지가 바꿀 수 없는 본질이거나 자연이고, 어디서부터가 사회문화적으로 바꿀 수 있는 구성물인지 섹스/젠더 이원론을 둘러싸고 끝없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우에노 지즈코 <여자들의 사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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