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겨울 속 여름을 간직하다

예술이 현실을 빛나게 할까

by 야생


In the depth of winter,

I finally learned

that within me

there lay an invincible summer.


Albert Camus


<화이트 힐>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리투아니아의 한 가족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이야기다. 깊은 겨울에도 마음 속에 여름을 간직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리투아니아는 우리나라보다 더 비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18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합병된 후 제 1차 세계대전 때 독립했으나, 1940년 다시 소련에 강제 점령 합병되었다. 1941년부터는 독일의 지배를 받다가 1944년 다시 소련군에 점령되면서 소비에트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이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1930년에서 1950년까지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스탈린과 소련 정권에 의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가족들은 흩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리나는 15살의 여자 아이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집에서 그림만 그리기 때문에, 친구가 없을까봐 엄마가 걱정할 정도다. 리나는 카우나스 예술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자기가 정말 갈 수 있을까 걱정한다. 이 때 아빠는 모두가 그렇게 걱정하다 아무도 그 학교에 지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냐며, 리나의 꿈을 적극 지지한다. 하지만 엄마는 시국이 시국인 만큼 리나의 예술학교 진학을 무조건 찬성할 수 없는 입장이다. 리나가 현실을 직시하기를 원한다.


삶은 그림이 아니란 것도 알아야 한다.
삶은 예술이 아냐 .
움직이고 변하지 .
삶은 현실이야.

리나 엄마의 말


예술이 현실을 빛나게 할 수도 있지.

리나 아빠의 말


마침내 카우나스 예술학교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입학에 대한 합불 통지서다. 리나는 아빠랑 같이 편지를 뜯겠다며, 아빠의 귀가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 날밤, 소련군들이 리나의 집에 들이닥쳐 아빠를 제외한 세사람 엄마, 남동생, 그리고 리나를 체포한다. 그리고 그들은 아빠의 생사도 모른 채, 6주간 지옥과 같은 열차에 실려, 더 지옥 같은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진다. 리나는 여전히 편지를 뜯지 않은채 아빠의 행방을 알고자 하지만, 알 도리가 없다. 하루하루가 지나고 리나는 혹독한 노동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자기가 본 것들을 그림으로 남긴다.


사실 리나의 아빠는 그들이 카우나스에서 체포되던 날, 소련군에 의해 총살 당했다. 그는 대학교수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문서를 위조했고 그것이 들통났던 것이다. 가족들이 시베리아로 쫓겨난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아빠도 사전에 가족들이 처할 위험을 가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자신은 총살형에 가족은 시베리아 유배를 가게 된 것이다. 현실의 벽을 넘어 여름을 꿈꾼 리나 아빠의 이야기다.

"우리는 현재 삶의 벽을 넘어야 해 . 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을 도와야지."




한편 강제 노동 수용소 사령관은 그림을 잘 그리는 리나를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먼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다. 리나는 열심히 스케치한다. 그런데 완성한 그림은 사악한 모습의 사령관. 그는 제 2의 반고흐가 나타났다며 얼버무리고 리나를 놓아주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리나의 엄마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 그 수용소 사령관은 그녀에게 우체국에서의 번역일을 제안한다. 이 일을 수락하면 그녀를 포함해 아이들도 추운 시베리아 벌판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그녀는 거절한다. 그 일이 그들에게 부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그녀 안에 깃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여름이란, 이런 것일까.



리나 가족의 겨울은 점점 더 가혹해지는 듯 하다.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가 폐쇄되는 상황에서, 그들은 몇몇 착출된 사람들과 함께 북극권에 있는 랍테프해 트로피모프스크라는 곳으로 추방된다. 몇개월에 걸쳐 열차를 타고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눈덮힌 허허벌판이다. 곧 겨울이 닥쳐올 즈음이라,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거처할 곳을 얼기설기 지어야만 했다. 그냥 죽으라고 보내진 것 같다. 끝내 리나 엄마도 점점 쇠약해져서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녀는 그곳의 사령관 니콜라이에게 두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그리고 리나에게는 아빠의 죽음을 알리면서, 마지막 말을 남긴다.


너한테 말해주지 않은게 있어.
널 지켜주려고 그랬던 거야.
네 아빠는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
네 아빤 수많은 사람을 도와줬어.
네 사촌과 우리 가족 모두를.
아빠가 하신 일을 반드시 기억하거라.
꼭 기억해야해.
요나스한테 말해, 언젠가 때가 되면.
네 자신을 믿어라.
네가 이끌어야 돼, 네 아빠처럼.


리나는 엄마가 죽자 니콜라이의 사무실을 찾아간다. 자신들의 의지에 반해 갇혀 있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3가지를 요청한다.

첫째, 일일 배급을 원합니다.
둘째 따뜻한 옷과 담요를 주세요.
셋째 의약품이 필요해요.


이 말을 들은 니콜라이는 술잔을 바닥에 던져버린다. 이때 리나는 그의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놓는다.

"제가 본 모습이에요."

니콜라이의 초상화다. 그는 그 초상화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다. 초상화 속의 니콜라이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니콜라이는 어머니가 우크라이나 출신이기 때문에 소련군대 내에서도 주변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소련 군복을 입었으나, 자기가 원해서 입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통받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을 동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밖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의 상관은 그를 골탕 먹이듯 죽음의 땅인 트로피모스크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탈출을 시도한 여성을 총으로 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니콜라이는 그날 밤 아내와 아이의 사진이 들어있는 목걸이를 꺼내본다. 본래의 니콜라이로 돌아온 듯하다. 그리고 그는 타이프 라이터로 리나와 요나스(리나의 동생)의 사면 허가서를 작성한다. 아침이 밝았을 때, 그의 부하가 발견한 것은 천장에 매달린 니콜라이. 니콜라이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추운 겨울을 끝내고 따뜻한 여름을 맞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깊은 겨울을 뚫고 나온 리나도 카우나스 예술학교에 진학해 아무도 빼앗을 수 없었던 여름을 발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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