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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Jan 04. 2022

선물 같은 하루  기적 같은 시간


 창으로 들어오는 포근한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혀 살포시 눈을 떴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아... 또 하루가 흘렀구나.'


제주를 떠나 호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눈을 뜸과 동시에 떠올랐다. 춥고 흐린 날씨로 엄마가 해주시는 따순 밥을 먹으며 집에서만 뒹굴거린 지 며칠째다. 이 햇살을 두고 오늘만큼은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서둘러 아이를 깨워 친정 엄마가 해주신 굴죽으로 아점을 먹고는 세 모녀가 택시를 타고 나섰다.


 택시 기사님이 들려주시는 한국 정치 이야기부터 서울서 외국계 회사에 다니느라 일 년에 두어 번 보기도 힘들다는 아들 이야기까지 듣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닿았다. 도착한 곳은 삼양동 선사 유적지… 고요한 동네에 움막이 몇 개 서있고 아담한 관람실에는 기원 후 1세기경에 출토된 토기, 청동기시대 장신구 등 소박한 전시품들이 잠을 자듯 전시되어 있었다. 매표소도 관리인도 없고 관람객도 우리가 전부. 요새 부쩍 사진 찍기 싫다는 딸아이 대신 혼자 원주민 동상 옆에 서서 우스꽝스러운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선사시대의 흔적을 뒤로하고 동네 길을 따라 조금 걸어 내려가니 해변이 보인다. 쓸쓸한 겨울 바다의 파도에 밀려 춤을 추는 모래알들이 빛을 받아 사금처럼 반짝인다. 제주도에 두 곳뿐이라는 검은 모래 해변. 이곳 삼양동 해수욕장이 그중 하나다. 부서지는 하얀 파도 아래로 드러나는 고운 검은 모래가 수채화 같은 해변 풍경에 진한 색을 더한다. 인파가 없는 겨울 해변은 쓸쓸하고 고요했다. 맨발로 뛰어다니며 발가락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고운 모래의 감촉을 느끼고 싶지만 겨울바람에 맨살을 내어 놓을 용기는 없다.  아쉬운 대로 엄마, 나 그리고 딸아이의 발을 한 짝씩 모아 발 사진을 남기고 고즈넉한 해변을 말없이 걸었다.  



 늦기 전에 저녁을 먹자며 해변가 조용한 근고기 전문 식당에 들어갔다. 유적지와 해변처럼 이곳도 손님은 보이지 않고 직원 둘만 구석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감상하기 딱 좋은 커다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 안엔 이미 연탄이 빨갛게 달구어져 들어있었다. 우리는 제주도 흑돼지를 주문했다. 바다로 떨어진 불덩이는 세상을 물들이며 빠르게 수평선 아래로 잠기어 간다. 온갖 색이 그러데이션 된 하늘은 점점 진한 보라색으로 물들고 바라보는 내 심장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환상적인 노을이 드리운 제주바다도 사춘기 소녀의 마음은 오래 붙잡아 두지는 못했다. 풍경에 잠시 머문 시선을 어느새 거둬들여 아이는 다시 읽던 책에 빠져들었다.



 두툼하게 썰어 초벌구이를 한 흑돼지 근고기가 들려 나오고, 보글보글 김치찌개, 계란찜, 멜젓, 상추, 깻잎장아찌 등 반찬들이 따라 나왔다. 반주를 좋아하는 모녀가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엄마와 잔을 부딪히는 소리도,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도 너무나 청량하다.  두툼한 선홍빛 고기가 탈 새라 연탄불에 열심히 뒤집어가며 구워 멜젓에 살짝 담가 파무침과 함께 한 쌈 먹어본다. 역시 말이 필요 없었다. 스테이크 부럽지 않은 육즙과 연탄의 불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제주도는 멜젓에 마늘과 고추를 넣고 끓여 쌈장으로 먹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열심히 고기를 굽는 동안 어느새 하늘은 시뻘겋게 타오르고 어둠과 함께 하늘에도 바다 위에도 등불이 하나 둘 켜진다. 하늘에 별빛, 바다 위의 배들이 보내는 빛, 등대의 불빛, 해변 도로의 가로등 불빛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밤바다를 완성하고 있었다. 행복한 포만감이 밀려왔다.  




 식당에서 나와 밤바다를 걷다 보니 2층짜리 주택을 개조해 꾸민 아담한 카페를 만났다. 겨울  밤바다의 바람을 피해 따스하고 환한 빛이 가득 새어 나오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처마 아래 달린 랜턴, 포크 모양의 문고리, 디저트 디스플레이 테이블로 쓰인 앤틱 한 화장대며 다른 나라, 다른 세계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메리카노, 플렛 화이트에 딸아이가 고른 커다란 슈크림빵과 티라미수, 마들렌을 주문하고 2층 창가에 앉았다. 통유리 창으로 보이는 밤바다와 어스름한 노을이 마치 커다란 풍경화가 걸려있는 듯했다. 바람을 맞으며 걸었던 터라 따스한 커피 한 잔에 달콤한 디저트 한 입은 천상의 맛이었다.  엄마, 나 그리고 나의 딸... 이렇게 삼모녀가 바다를 거닐고 고기를 굽고, 예쁜 카페에서 밤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시는 일은 일상인 걸까 기적인 것일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이 순간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렇게 행복한 시간들을 누릴 수 있을까. 갑자기 쓸데없는 두려움이 싹을 틔워 도리질을 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행복감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에 과거에 집착하지도 말고 미래에만 매달리지도 말고 현재를 살라고 한다. 우리 삶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라는 메시지를 한번 더 떠올려본다. 아쉬움과 두려움은 모두 과거와 미래에 대한 마음이다. 어린 시절엔 나는 시간이 무한한 듯 보였다. 그래서 순간의 소중함이란 생각조차 못했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매 순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선물이었다는 것을.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며 괜스레 딸아이에게 한마디 하고 만다. 엄마랑 할머니랑 보낸 오늘이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후에  이런 시간을 원할 때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거라고.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고 감사한 날들임을 잊지 말라고.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을 아이에게 한 것이다. 엄마의 짧은 잔소리를 우리 딸은 이해했을까. 선물 같고 기적 같은 오늘 하루도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안녕 제주, 안녕 보고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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