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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홉 May 15. 2022

나다움

마지막 남해살이, 도시로 복귀하기


“윤홉 님이 열심히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최근 서류를 넣었던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인터뷰 중반부쯤에 면접관이 이런 질문을 했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그리고 지금 윤홉 님의 답을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해서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면접에서 이런 것도 물어보나? 잠깐 놀랐지만 짧은 시간 동안 나에 대해 돌아봤다. 내가 열심히 살았던 원동력.

“처음엔 불안감, 이제는 즐거움인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그건 20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각종 대회와 공모전, 어학연수, 대외활동 등 교내와 교외를 오가면서 미친 듯이 참여했다. ‘불안감’ 때문이었다. 평범한 인문계 학생이었던 나는 늘 답답했다. 공부도 썩, 그렇다고 거창한 꿈이 있지도 않았던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두려웠다. 나다운 선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남의 기준을 빌려와 결정을 내리곤 했다. 폭넓은 시야와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막함과 두려움은,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변했다.


등록금 뽕을 빼야겠다는 결의를 안고 신입생이 되었다. 학교를 설렁설렁 대충 다니겠다는 마음은 1원도 없었다. 학과 동아리를 3개나 했고, 알바와 과제, 교내 봉사 프로그램 기획단으로 참여했다. ‘일단 해!’라는 주문은, 진짜로 내가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게 만들었다. 1학년 후반부터는 공모전에 나갔다. 영상편집도 할 줄 몰라서 조교님을 꼬셔서 편집을 배웠다. 입상에 그쳤지만, 새내기였던 나에게 엄청난 자극이 되었다.


돈은 없고 열정만 넘쳤던 우리는 그때부터 영상 공모전에 닥치는 대로 나갔다. 상금이 목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공 수업은 저절로 소홀해졌다. 재미없는 이론과 툴만 배우는 실습은 지겨웠다.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 마음 맞는 네 명과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교내에서 지원해주는 창업 면접을 봐서 붙었다. MCN 영상 유튜브 창업. 21살이었던 우리는 지원비로 각종 장비를 구매했다. 돈이 없어서 못 했던 편집 효과, 폰트, 배경지, 조명까지. 학과에서 매일 대여 장비를 빌렸던 우리였기에,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무척 기뻤다.


야망을 품고 매주 2회 영상을 찍고 편집했다. 사람을 섭외하고, 기획하고, 회의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2년이나 했다. 모은 돈은 당연히 없었지만, 나를 알아갈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영상’ 말고 더 다양한 일을 하고 싶었던 나는 팀에서 나와 각종 문화예술 행사를 직접 만들었다. (함께 일했던 영상 멤버 한 명은 대표가 되어 현재 사무실을 차렸다. 그를 보면서 박수와 응원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친구가 얼마나 영상을 사랑하는지 2년 동안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 나에게 영상은, 재밌었지만 삶에서 이루고 싶은 대단한 목표는 아니었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을 꾸리자. 개인적인 다짐은 우연히 문화기획으로 닿았다. 내가 해오던 일과 생각이 하나의 분야로 짜여있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혼자 해오던 문화 기획을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종로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3개월 동안 교육을 들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1시까지 혜화로 출근했다. 끝물에는 2주 인턴 실습을 했고 기획서를 발표했다. 회사에서 내가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일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치열하고 힘들었던 교육을 들으면서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했다. 서울문화재단 시민기획단 문화행사, <남의 집> 인포그래픽 웹 전시, 교보문고 디자인 스티커 공모전, 일러스트 공모전 등.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고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나는 무언가를 시도할 때 ‘하고 싶은가’에 기준을 둔다. 해보고 싶은가. 한 번도 배워보지 않은 분야라도 일단 그런 마음이 들면 머리부터 들이밀고 봤다.


인포그래픽 웹 전시를 열 때도 그랬다. 포토샵엔 익숙했지만, 일러스트 툴은 아예 사용한 적도 없었다. 초보가 난이도 높은 ‘인포그래픽’ 전시를 열겠다니. 허무맹랑한 꿈을 위해 나는 천천히 설계를 시작했다. 사실 인포그래픽 전시기획은 ‘일러스트’ 툴을 온전히 배워야겠다는 목표로 선택한 거였다. 그러려면 디자이너가 필요했다.


오픈채팅방 드로잉 모임에서 친해진 지인 두 명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여성가족부에서 지원하는 청년 프로젝트에 직접 서류를 쓰고 면접을 봤다. 예산을 따온 후 디자이너였던 지인 도움을 받아 인포그래픽 작품을 제작했다. 일러스트 기획을 배우고 툴을 연습했다. 피드백을 받으며 한 편의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꽤 좋은 성과도 있었다.


이후에 문화기획사에 들어가 일하다가 남해로 내려가서 지역 기획을 시도했다. 이 모든 것들은 ‘지금은 왜 안돼?’라는 오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문화기획을 하던 친한 언니들도 지역에서 기획해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우리 넷은 모이기만 하면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끝은 ‘지금은 어렵지. 연고도 없고’에서 그쳤지만. 회사를 퇴사하고, 나는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이라서 가능하지 않을까?


바로 남해 6주 살기에 지원했고, 여행이 끝난 뒤 전입신고를 했다. 용기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남해 청년단체와 협업해서 지역문화기획자로 일할 수 있었다. 프리마켓, 영화제, 교육 클래스 등 각종 문화 프로그램을 열었고, 인력이 부족했던 시골에서 글쓰기, 영상, 사진 강사로도 일할 수 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도전을 위해 다시 도시로 복귀했다. 몇 편의 시도를 경험하면서, 모든 선택과 결정에 즐거움이 크다는 걸 깨달았다. 불안감으로 울부짖던 어린 내가 아닌, 나다운 방향을 위해 도전하는 나 자신만 남았다.


26살. 이제는 내가 누군지 너무 잘 안다. 좋아하는 관심사와 분야에서 동료들과 일하고 싶다. 콘텐츠나 커뮤니티 서비스 쪽이면 좋겠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가치와 정보를 전달하는 걸 즐기는 내가, 그런 일로 나다움을 만들고 돈을 벌 수 있으면 얼마나 재밌을까. 업에 대한 결심은 언제나 삶의 가치관과 닿아있었다.


평소 즐겨보던 한 스타트업에서 커뮤니티 팀 인턴을 뽑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공고를 본 게 이틀 전. 1년 전에 머물렀던 포트폴리오를 밤낮으로 업데이트했다. 서류 합격과 1시간 면접을 끝으로 마침내 나는 원하던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재밌는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생업이란, 일이 아니고 삶 그 자체인 것 같다. 나라는 사람 전체.

하고 싶은 일, 취향, 되고 싶은 것들을 차곡차곡 프로젝트로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니까.



앞으로도 내가 어떤 일을 꾸릴지 기대가 된다.

오로지 즐거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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