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에게
어떤 가수가 그랬는데 삶은 잘 짜인 장난 같은 거래. 요즘 나는 그 말을 꽤 실감하고 있어. 남해에 오게 됐을 때부터 삶은 장난이었는지도 몰라.
재작년 겨울에 정말 우연히 백패킹을 한 적이 있어. 그땐 일을 엄청 몰아치듯이 끝낸 상태라 몸과 마음이 무척 지쳐있었어. 같이 가자는 친구들 말에 이끌려서 홀린 듯이 굴업도를 다녀왔어. 굴업도가 어떤 곳인지는 전혀 몰랐어.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고 그냥 따라간 거야. 여행을 싫어하는 내가, 그때만큼은 어딘가로 훌훌 떠나고 싶었던 것 같아.
15kg 배낭을 메고 등산을 했을 땐 정말 괴로웠어. 양손에 가득한 먹을거리,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가방은 도저히 내 체력으로 감당할 수 없었어. 매 순간 걷는 게 고비더라고.
두 시간이 조금 넘어서 완등 했을 땐, 내가 살면서 처음 보는 풍경이 거기에 있었어. 절벽에 사는 사슴과 코 앞에 떠있던 푸른 바다. 깎아내린 절벽, 그 모든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보였어. 자연이 만든 풍경은 정말로 감동이더라. 아직까지도 그 모습이 너무 생생해.
그때를 잊지 못해서 남해에 지금까지 머물고 있는 줄도 모르지. 6주 동안 남해에서 놀고먹고 여행하면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백패킹 여행을 했었어. 그게 벌써 작년 여름 일이네. 한달살이가 끝나고 나 포함해서 한 두 명을 제외하곤 모두 서울로 돌아갔어.
자연을 누비면서 남해 바래길을 걷고, 모르는 사람에게 히치하이킹을 하고, 밖에서 텐트를 치고 잤던 시간들이 눈 깜짝할 세 였네. 그때의 사진을 보면 정말 긴 꿈을 꾼듯해. 남해에 산 지도 벌써 4~5개월쯤 되었네. 이곳에도 겨울이 오긴 하더라.
얼마 전에 너와 바래길을 함께 걸었잖아. 그날은 유독 바람이 심했고. 오늘 걸어도 되냐면서 걱정했었지. 근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 오히려 평범했던 길이 모험처럼 느껴졌어. 좋다고 했다는 말이 진심이었어.
몇 번의 해변을 걷는 동안 빛은 바다에 듬뿍 쏟아졌고, 윤슬이 너무 아름다워서 계속 멈춘 거 기억나? 몽돌해변에서는 정말로 돌멩이 구르는 소리가 났어. 파도 소리가 심해서 처음엔 못 들었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이니까 파도에 묻힌 구르륵 소리가 나더라고.
k, 네가 좋아하는 유구 해변에 도착했을 땐, 비밀스러운 섬에 온 듯한 느낌이었어. 좀 더 머무르고 싶었는데, 역시 겨울은 겨울이더라. 겨울바다는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것 같아. 햇빛이 강렬해서 백색 빛으로 떠오른 윤슬을 눈에 훔치면서 뒤로 걸었어.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은 날이었어. 아무리 바람이 강해도 다 괜찮은 기분이 들었거든.
사천, 몽돌, 유구까지 걸었을 때, 바다는 모두 다르구나 생각했어. 물결치는 속도, 색깔, 마을의 분위기까지 같은 게 하나 없더라. 어쩌면 바다는 자신을 '바다'라고 부르는 걸 슬퍼하지 않을까. 이토록 다른 바다들을 바다로만 통칭하기엔 나도 이렇게 아쉬운걸.
너는 유구해변이 한적하고 예뻐서 좋다고 했잖아. 나는 몽돌해변이 가장 좋았어. 해변에 쌓인 돌멩이가 파도에 밀리는 소리는 정말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때의 윤슬은, 내가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될 정도였어.
이토록 황홀한 즐거움이 늙을 때까지 계속된다면 얼마나 삶이 아름다울까. 인생이 희미하다고 느꼈던 내가 이런 마음이 들었어. 그날이 얼마나 나한테 귀중한 영감이 됐는지 너는 알까. 너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그날의 일기가 올라왔던 걸 보면 분명 우리가 같은 기분이었다고 생각해.
너와 숲과 바다를 걸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사람이구나 깨달았어. 추운 나라에서 오로라 헌팅을 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몽골에서 한 달 여행을 하고 싶어. 가장 큰 배낭을 메고 인도로 떠나 명상을 배우고 싶고, 아프리카에 가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어. 코로나가 좀 괜찮아지면 당장이라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날지도 몰라.
그때 k 네가 그랬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려고 준비했었다고.
그래서 나도 그랬지.
나는 매일 산티아고 순례길 영상을 본다고.
너와 나는 여전히 걸으면서 말했어.
우리는 남해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만났을 거라고.
내가 그랬잖아.
우리는 정말로 산티아고에서 우연히 만났을 거라고.
너도 동조했고 이번에는 좀 더 진심을 다해 떠올렸어. 우리가 다음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같이 가게 될 거 같다고.
소중한 인연은 자연스럽게 운명처럼 찾아온다고 해. 어렵고 복잡한 게 아니라, 평화롭고 당연하게 맺어진다고. k, 나는 너와 걸으면서 그 사실을 믿게 되었어.
2022. 02. 05
남해에서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