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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daal May 17. 2023

낱말의 태도

[둥근사각형] 5. 틀렸다 vs. 흥미롭다


틀렸다는 말을 듣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나는 손을 들고 대답을 하지 못했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는 질문은 '내가 생각하는 정답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와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대다수의 친구들은 손을 들지 못했다.


'정답'을 맞추지 못했을 때 돌아오는 선생님의 '땡'에 버금가는 반응이 두려웠다. '다른 사람?' '또?' 이 정도는 귀족적인 표현이다. 전국노래자랑에서나 들을 법한 야박한 '땡', 즉 '틀렸어!'라는 반응이 많았다. 틀렸으니 틀렸다고 말하는 건 틀리지 않지만 관점의 차이와 창의성에 있어서 잘잘못을 판단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단순히 말의 문제만은 아니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상대가 틀렸다는 말을 하더라도 내가 그 상황을 감정이 아닌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학교 들어갈 나이부터는 쉽지 않은 태도가 된다. 나의 대답이 '오답'인 상황이 반복되면서 집과 학교와 사회에서 우리는 정답이 아닌 바에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점점 숨기게 되어버린다.




수학수업에서 싸인과 코싸인 그래프를 그렸던 상황이 생생하다. 3 분단 첫째줄에 앉아있었던 나는 꽤 신중하게 반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수학선생님은 내게 '넌 미술은 하지 말아라.'며 진심 어린 농담을 하셨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미대에 갔다. 시각디자인이었는데 나는 그 당시에도 그림을 그릴 줄 몰랐다. 다행히 아이디어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정도로 평가되는 학교였고 반원과 직선조차 제대로 못 그리는 나는 턱걸이로 붙었다. 표현의 재료에는 연필 이상의 것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컴퓨터를 친구들보다 열심히 했었다.


하루는 워터칼라와 아크릴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수업이 있었는데 물감의 농도를 맞추지 못해 내 그림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선생님은 '너처럼 색을 더럽게 쓰는 사람은 못 봤다.'라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엉망이라 사실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인정을 했다. 난 워터칼라로 밑그림을 그린 후 그 위에 검은색 아크릴로 덮었다. 10살 즈음 미술시간을 떠올리며 얇고 뾰족한 도구로 마른 아크릴 물감 표면을 스크래치 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기억이라 흐릿하긴 하지만 이솝우화 책의 표지를 그렸던 것 같다. 검은색 상단 레이어를 긁을 때마다 하단 레이어의 색이 드러나고 여우의 꼬리같이 뻣뻣한 질감을 표현하는 등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기법이었다. 워터칼라를 사용할 땐 그것이 나를 조절하는 느낌이었다. 학교 벽에 결과물이 걸렸고 선생님 역시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셨다.


다행히 나는 선생님의 말을 꽤나 객관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어떤 상처도 남기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상대의 피드백이 두렵다. 말과 생각을 아끼게 된다. 그러다가 내가 품고 있던 생각이 맞았다는 걸 다른 친구의 대답을 통해 알게 되면 나는 숨죽인 것에 대해 스스로 안타까워한다. '아, 말할걸.'




Interesting!


하루는 내게 콕 박힌 낱말을 알게 되었다. 호주에서 학교를 다닐 때 수업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Interesting.!"이라는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내가 이 상황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학생의 대답은 '틀렸다.'에 가까웠다. 하지만 선생님은 '흥미롭다'라는 반응을 해 주셨고, 그 말을 들은 다른 학생들은 더 자유롭게 '흥미로운' 대답들을 끄집어내었다.


'틀렸다', '아니다'라는 말 대신 '흥미롭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감이 생기고 그것이 쌓여 자존감이 단단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흥미롭다는 말을 자주 쓴다. 다만 상대가 내게 그 단어를 쓸 때면 '신기하네?'로 해석되면서 '아, 내가 틀렸구나.'라는 생각 역시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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