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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세수 Mar 03. 2022

우리는 각자의 화분 안에서 산다.


새 학기가 되었다. 조카는 학교로 돌아갔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새 자취집과 룸메이트와의 사진을 올렸길래 DM을 보냈다.


“00으로 간 거야? ㅋㅋ”

“ㅇㅇ ㅋㅋㅋㅋㅋㅋㅋ 개강 ㅜㅜ”


새로운 공간에서 3명의 룸메이트와 복작복작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자취를 처음 해보는 여자들 넷이 모여 얼마나 좌충우돌할지 안 봐도 뻔했다.


지난 2월, 조카가 기숙사에 떨어졌다. 기숙사 발표가 늦게 나는 바람에 언니 집에 비상이 걸렸다. 1년간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던 조카의 룸메이트들까지 모두 떨어졌다. 개강까지 얼마 남지 않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조카를 비롯한 룸메이트 3명은 방을 구하러 학교 근처로 급히 가야 했다. 구정 연휴 차 언니 집에 놀러 온 나는, 언니가 쉬는 날 강릉 핫플레이스 카페나 갈까 했었다. 하지만 한가한 생각이었다. 나도 덩달아 조카의 방을 보러 경기도 ㅇㅇ시에 갔다.

조카와 3명의 룸메이트는 한 방을 쓰거나 한 건물에 모여 살길 원했다. 이렇다 보니 방을 더 구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싶었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방 자체가 없었다. 학교 주변은 이미 전멸이었다. 막막한 기분에 잠시 멈춰있을 때, 조카의 룸메이트가 부모님이 방 하나를 소개받았다며 연락이 왔다. 마침 조카의 또 다른 룸메이트 중 한 명이 우리와 같은 날 부모님과 방을 보러 와서 다 같이 만났다. 우리가 본 방은 생각보다 많이 허름하고 낡았다. 나야 나이가 있으니 적응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취를 처음 하는 어린 친구들에게는 그야말로 문화충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쾌쾌한 냄새, 다 쓰러져가는 싱크대, 물은 잘 나오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낡은 화장실까지. 우리는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방이 없었다. 개강은 다가오고 이 방이라도 있는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학교까지도 20분이 넘게 걸어야 하고 버스도 다니지 않아 걱정이었지만 아무튼 방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월세가 저렴하고 방 크기가 4명의 아이들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날 모인 조카와 언니, 룸메이트와 룸메이트 부모님은 일단 이곳이라도 계약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후 나머지 아이들과 부모님들도 방을 보셨고 결국 아이들은 그곳에서 함께 생활하기로 했다. 다행히 주인분이 싱크대를 교체하고, 곳곳에 낡은 부분을 수리해주기로 했다고 했다.


조카와 방을 보면서 15년 전이 생각났다.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모아 뒤늦게 ㅇㅇ시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 그곳에 연고가 없어 기숙사가 절실했지만 불합격하고 말았다. 나는 기숙사가 떨어지자 속상함에 눈물부터 났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등록금이며 생활비는 어느 정도 마련했지만 자취방까지 구하자면 돈이 더 필요했다. 철이 없던 나는 방한칸 구해주지 못하는 부모님이 미웠다.

그 당시 나도 기숙사 발표가 개강에 임박해서 나는 바람에 부랴부랴 방을 구해야 했다. 언니와 형부는 함께 ㅇㅇ시로 방을 구하러 가주었다. 조카도 함께였고 당시 5살이었다. 우리는 아무 정보도 없이(방 구하기 어플도 없던 시절) 무작정 학교 근처를 돌면서 전봇대나 담벼락에 붙여진 ‘방 있음’이라는 전단지를 일일이 확인했다. 어렵게 가격이 적당한 반지하방을 찾았고, 입시 과외를 받으며 알게 된 친구와 돈을 반반 부담해 1년간 생활했다. 그때 나는 방을 구하는 문제로 무척 예민했다. 적은 돈에 맞춰 방을 구해야 했고, 방이 많지도 않았다. 방을 구하고 나서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난했다. 방을 구한 다음날 아침, 밥을 먹으러 가는 차 안에서 밤새 잠자리가 바뀌어 언니 품에서 울던 조카에게 시끄럽다고 짜증을 냈다.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언니는 나에게 화를 냈고 형부는 묵묵히 운전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형부도 화가 많이 났지만 철없는 나를 잘 알기에 꾹 참았던 게 아닐까.

“나 대학 들어갈 때 자취방 구할 때도 네가 같이 갔었는데!”라고 조카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조카에게 짜증을 냈던 기억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조카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지금도 미안함이 남아있다.


조카가 몇 년 전 서울에 놀러 온 적이 있다. 내가 서울에 살고 있어도,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편하게 놀러 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평일에 회사에서 에너지를 쏟아내느라 주말이면 피곤했다. 조카는 그림으로 진로를 정하면서 서울로 무척 놀러 오고 싶어 했다. 딱 한 번, 보고 싶은 전시회가 많다며 언니가 전화로 부탁을 해와서 조카가 서울로 올라왔다. 마침 서울, 강릉 간 KTX도 개통한 시기였다. 주말 동안 우리는 전시회를 보러 다녔다. 예술의 전당, 현대미술관 등을 돌아다니고, 취향이 비슷한 우리는 피규어샵도 구경하러 다녔다. 조카는 들떠보였고 무척 신나 했다. “엄마가 없으니 너무 편해” 잔소리하는 엄마와 잠시 떨어져 있으니 좋다는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였다. 그때 나는 조카를 조금 알게 됐다. 토이스토리를 좋아하고 편식은 여전히 심했다. 어디서든 브이를 그리며 인증샷 찍기를 좋아하고, 외출하면 꼭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야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미술관 입장권을 계산하려고 하면 “아니야 나 돈 있어”라며 거절할 줄도 알았다. 우리는 그렇게 발에 불이날 정도로 돌아다니고 추억을 남겼다.

고작 하루를 지내고 조카는 돌아가야 했다. 조카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역으로 갔다. 열차가 오자 잠시 같이 들어가서 좌석까지 확인해주고 나는 다시 플랫폼으로 나왔다. 출발 시간이 되자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내 열차는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뒤돌아서던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나를 어찌할 세도 없이 나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지금도 모르겠다. 나는 왜 그렇게 울었을까?


언젠가 이 이야기를 인스타그램에 쏟은 적이 있다. 나의 일본어 선생님이자, 친한 동생은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 전에 친구가, 우리는 각자의 화분 속에서 사는 거라서 “내가 내 화분을 벗어나서 너를 도와줄 순 없지만 내 옆에 사는 꽃인 네가 깨끗한 물을 마시고 햇볕도 잘 받아서 예쁜 꽃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준 적이 있어요~ 저한테 언니랑 조카도 그런 존재거든요! 저도 언젠가 조카가 좀 더 자라서 여행을 가게 되면 비슷한 감정을 느끼겠죠?


가끔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멀리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건지 슬플 때가 있다. 그래서 같은 지역, 가까운 거리에 오손도손 모여사는 가족들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떠나야 했다.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해 흩어져야 했다. 조카도 꿈을 위해 강릉에서 연고도 없는 지역에 있는 대학에 갔고, 언젠가 졸업하고, 취업도 하고, 결혼을 할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화분을 가꿔나갈 것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화분 속에서 산다. 나는 나의 화분을

지키고 있고, 엄마도 언니도 조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로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기쁨도 아픔도 대신해줄 수 없지만 마음은 같은 화분 안에 있을 수 있다.


-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쑥쑥 성장하길,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너의 화분을 지키며 견뎌내길. 그때 너를 보낸 후 한참을 울던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알아주길. 나는 나의 화분 안에서 네가 시들지 않도록 응원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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