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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세수 Mar 28. 2022

마흔에 만난 30년 전의 나

서랍을 정리하다가 어릴 적 일기장을 발견했다. 몇 년 전 본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일기장에는 ㅇㅇ 국민학교, 4학년 ㅇ반, ㅇㅇ번이라고 적혀있었다. 펼쳐보니 마침, 이맘때의 일기여서 반가운 마음에 읽어보았다.

엄마가 아빠 몰래 오디오를   , 친구의 생일에 용돈이 부족해  원짜리 초콜릿을 사준 ,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담임 선생님의 딸과 친해져, 친구들과 선생님 댁에 놀라갔던 , 비가  다음날 지렁이 때문에 짜증 났던 .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았던 것도 있고, 일기를 보면서 떠오른 기억도 있었다.

마흔이 되어 국민학교 4학년의 나를 이렇게나마 만날 수 있다니. 일기장을 버리지 않고 보관해온 당시의 나에게도, 그동안의 나에게도 고마웠다.


30년 전 3월 이맘때, 일기는 어땠을까?


제목: 담배 심부름과 동시


‘덜커덕’

“ㅇㅇ아! 담배 사 와라”

“(아이고, 또 시작…) 알았어”

“빨리 갔다 와!”

‘치- 자기는 배짱 좋게 비디오나 보면서”


오늘도 담배 심부름.

그러나 그 값은 받는다.

하지만 담배 심부름은 너무 지겹다.

그러나 가다가 산에 핀 진달래를 보고 내가 동시를 한번 지어 보았다.


<진달래 아가씨>


무겁게 오른

심부름 길에.


저 산너머

보이는 색실은 무엇일까?


저렇게 이쁜 건

처음인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진달래 아가씨가

있었어요.


나는

진달래 아가씨에게


‘뭐하셔요?’ 물으니

‘봄소식 전하고 있어요’ 하면서

다시 온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어요.


이야기를 끝내고

뒤돌아보니 진달래 색은

더 진해지고 발걸음도 가벼워요.


내가 살던 시골은 봄이면, 앞산에 진달래가 탐스럽게 피었다. 어릴 적에는 꽃의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을 지켜면서 마당에 앉아 진달래가 만개한 앞산을 보았다. 산은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삼 예쁘고,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동시는 갑자기 뒤로 가서 존댓말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진달래라는 동시 말고도 몇 개의 동시를 써 놓았다. 담배는 아마도 막내 외삼촌의 심부름이었던 것 같다.

4학년의 나는 일기를 쓰면서 마흔이 된 내가 이 일기장을 다시 볼지 상상이나 했을까? 어쩌면 막연히 생각을 했었기에 일기장을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열심히 다이어리를 쓰고 있다. 어릴 적만큼은 아니지만, 먹고 쓰는 돈, 소소한 일상적인 메모가 가득하다. 이 다이어리도 남겨두면 먼 미래의 내가 다시 읽어볼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상상했던 먼 미래의 내 모습처럼, 미래의 나는 이맘때쯤 어디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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