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책상과 책상 사이 곳곳에 놓인 화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내가 집에서 식물을 키우기 시작한 지 수개월이 지난 어느 여름이었다. 어딜 가든 자연스럽게 눈으로 식물이 있는 곳을 더듬어 찾는 내가, 그간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사무실의 식물들은 내가 아는 식물과는 전혀 달랐다. 초록의 생기나 빛을 잃은 식물들. 줄기와 잎은 물기를 머금지 못해 바짝 마른 채 가느다래져 있었고, 바깥부터 회갈색으로 변해버린 잎사귀는 앙상한 가지에 안타깝게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남은 생을 햇빛도 잘 들지 않고 척박한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비극적 운명에 처해 있었다. 곳곳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화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책상, 캐비넷, 탁자와 함께 사무실의 일부가 되어 병풍처럼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들은 주로 직원들의 영전을 축하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보내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화분 주인이 다른 부서로 옮겨갈 때 잊지 않고 챙겨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원을 알 수 없는 화분의 수는 점점 늘어난다. 대부분 전자파 차단에 탁월한 스투키와 선인장, 난, 혹은 금전수나 고무나무, 스킨답서스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몇 차례 부서를 옮기면서 일한 기억을 더듬어 봐도, 사무실에서 아름답고 푸르게 자라나고 있는 식물을 본 기억은 전혀 없었다. 관심 갖고 돌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 물을 주어야 하는지, 또는 그 식물이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기에, 눈이 시릴 만큼 허연 LED 조명 아래서 식물들은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말라 간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후로, 나는 회사에서 마주치는 모든 식물을 안타깝게 바라보곤 했다. 충분한 햇빛과 바람, 적절한 물 주기와 보살핌만으로도 쭉쭉 팔다리를 뻗어 나가는 그 초록의 영혼들이, 서서히 시들어 가다가 죽을 날만 받아 놓고 있는 모습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책임지고 그것들을 모두 챙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살아날 가망도 없어 보였다. 버석 버석거리는 잎을 간신히 줄기 끝에 매달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다 보면, ‘넌 어쩌다가 여기에 왔니?’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물론 너도 오고 싶어서 여기 온 건 아니겠지. 이곳에 모여든 대다수의 사람처럼.’
7년 차 직장인인 내가 일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전공과도 무관하고, 하고 싶은 일은 더더욱 아니었던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꽤 많은 인내와 자기합리화를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좋아하는 일>, <돈>,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실현 가능성을 가늠해 보곤 하지만, 슬프게도 내게 허락된 것은 겨우 먹고살 만큼의 돈을 벌 수 있지만 재미가 없으며 스스로를 갉아 먹는 일뿐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일을 남은 삼십 년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굴레에 빠져 있었다. 점점 말라비틀어지는 사무실의 식물과 함께 묵묵히 사막의 시간을 견디게 될 거였다.
식물로서의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오랜 시간 목숨만 붙어 있는 사무실의 식물들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무실이라는 감옥의 동기였다. 주어진 시간을 관성처럼 살다 보면 내가 궁극적으로 다다르게 되는 것이 이 모습이 아닌지 두려웠다. 화분의 흙을 만져 보면 흙이 머금고 있던 양분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촉촉해야 할 질감은 푸석거리는 모래 같았다.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채 장시간 메마른 환경에 놓인 식물은 그렇게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상태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그 상태를 쭉 유지한 채 새잎을 밀어 내지도, 꽃을 피워내지도 못한다. 만약 이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순응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그러나 나는 정말이지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햇빛도, 바람도, 촉촉한 흙의 촉감도 빼앗긴 채 살고 싶지 않다고 되뇌었다. 볕이 드는 쪽으로 목이 점점 길어지는 자연의 식물들처럼 나의 광원을 찾아 헤매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마음껏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글 - 주페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