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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페페 Oct 27. 2024

P 호텔의 욕조

241006

 

 그 호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고전영화에서 보던 것 같은 모양의 욕조였다. 백색의 욕조를 이루고 있는 곡선이 갓 포장을 뜯은 비누처럼 우아했다. 일반 가정집에 있는 욕조와는 달리 P 호텔의 욕조에는 금색 발이 네 개나 달려 있었다. 마치 만화 알라딘에서 주인공들이 타고 다니는 마법 양탄자처럼 욕조에 들어가는 순간 공중에 부웅-하고 떠오를 것만 같았다. 욕실 바닥은 커다란 다이아몬드 모양 패턴의 타일로 뒤덮여 있었는데, 타일과 욕조, 그리고 욕조 옆에 배치된 초록색 벨벳 의자가 그림처럼 어울렸다. 


 갑자기 호텔에 간 것은 순전히 충동에 의해서였다. 매일 같이 집과 회사만을 오가는 삶이 너무나 무료했다. 인생이 더 재미있을 순 없는 걸까, 매일 퇴근 후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회사에 가고, 정신없이 일을 하고, 퇴근하면 다음 날 이 모든 것이 반복될 때까지 주어진 작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돈을 벌고, 매일 같은 것을 반복하고, 나 자신을 혐오하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삶이 싫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매일 소리치지만, 정작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전 혼자 성수동의 카페에 갔을 때였다. 날이 너무 좋았고,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그대로 집에 가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저장해둔 카페에 가보고 싶었다.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한 인테리어를 한 카페였다. 도착해 보니 이른 시간임에도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커피나 한잔 마시며 조용히 책이나 읽을 심산이었던 나는 생각과 다른 카페 분위기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왠지 내가 오면 안 될 곳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문을 받는 직원을 향해 메뉴 이름을 힘주어 말했다. 


 혼밥이라는 것이 유행하기 한참 전부터 나는 혼자서 밥도 먹고 쇼핑도 하고 카페에 가는 것도 좋아했었는데, 왜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이 그리도 어색했을까. 별 목적 없이 시간을 내어 예쁘고 근사한 곳을 찾아간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단 것을 새삼 깨달았다. 주말이면 집에 반송장 상태로 누워 있다가 어딘가 나가 책이라도 읽고 올까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귀찮음에 못 이겨 체념해 버리기 일쑤였다.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제 몫을 다하기 위해 있는 힘껏 살고 있는 나에게 스스로 해주는 보상이라고는 퇴근 후 마시는 맛있는 맥주 한 잔, 그 정도이려나. 스스로에게 뭔가 좋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번거로움>이나 <사치>의 영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가치를 위해 포기하고도 그것이 합리적인 일이라 굳게 믿게 되는 과정인 것 같다.


 명절 보너스 덕에 잠시나마 통장 잔고가 두둑해졌었지만, 대부분의 돈을 이미 저축해버린 상태였다. 다음 달 카드값을 셈해보며 이 충동적인 호텔 여행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이었는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호텔 욕조의 아름다움은 그 고민마저 무색하게 했다. 금색의 수도꼭지를 돌리자 따뜻한 물이 욕조 안으로 콜콜 쏟아지기 시작했다. 욕조가 따뜻한 물로 찬찬히 채워졌다. 집에서 가져온 보랏빛 입욕제를 물속에 풀어 넣었다. 기분 좋은 달콤한 향이 공기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넓은 욕조는 처음이야!’


 과연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워도 충분했다. 애플뮤직으로 조성진이 연주하는 드뷔시를 들었다. 물속에서 잠겨 책을 읽으며, 왜 집에 있는 욕조에서는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없는 걸까, 하고 생각에 잠겼다. 평소 나는 숨이 막히고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어 더운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 욕조에 잠겨 있는 동안 내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고, 몸이 후끈거리기는 했지만 숨이 막히진 않았다. 오히려 온몸의 근육이 풀어지고 노곤 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겨울날 배를 뒤집고 뜨끈한 방바닥에 늘어붙은 고양이처럼 나는 욕조와 하나가 되었다. 


 내가 하룻밤 호텔에 머물며 한 것이라곤 그저 음악을 들으며 목욕하고, 책을 읽고 드라마를 한 편 본 뒤 맛있는 것을 먹은 것뿐이었다. 그리 특별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의 모든 근심이 저기 너머에 있었다. 고민거리는 집과 회사 같은 곳에 던져 둔 채로 나는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로또라도 당첨되지 않는 이상 가까운 시일 내에 내가 또 비싼 호텔에 묵으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욕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사람이 되었다. 짐작해 보건대 그 멋진 욕조가, 그 황금색의 수도꼭지가 늘 우리 집에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이따금 나에게,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아름다움을 하나씩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 글, 그림 주페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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