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02
어느덧 11월이 되었다. 카페에 앉아 한 달 간의 업적을 찬찬히 정리해 본다. 월말이 되면 그달의 성과를 정리하고 다가오는 달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나의 루틴이다. 10월의 주된 성과는 드뷔시의 <달빛> 암보를 거의 끝마쳤다는 것과, 쇼팽의 <이별의 왈츠> 연습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루어 두었던 데모 녹음을 주말마다 사부작 사부작 시작했다는 사실.
별 의미 없이 사는 것 같아도 이렇게 한 달을 되돌아 보면 그달 그달의 분명한 테마가 있다. 7월에는 운전연습을 많이 다녔고, 8월에는 글쓰기를 열심히 했었고, 9월에는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다는 식으로. 그렇게 되새김질 하다 보면 의미 없이 흘러간 것 같은 시간들이 모여 꽤 촘촘한 흐름을 만든다는 걸 느낀다. 실제로 그것이 유의미한 내적 변화를 만들어 냈는지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는 작은 위안을 얻는다.
이번 주는 이상하리만치 몸도 기분도 엉망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사에서 며칠간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어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내가 줄곧 지루하다고만 느끼던 일상이 실은 얼마나 정교한 노력으로 만들어낸 평온함에 기반한 것인지, 그것이 깨지고 나서야 절실히 느꼈다.
그 빈틈에는 일렁이는 불안의 마음이 스며들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끊임 없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나는 비로소 ‘스트레스’라는 것이 얼마나 실재하는 것인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제발 다시 불안을 모르는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혼자 되뇌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적 없이 도망치고 싶었다.
하나-둘-셋-넷-하나아-두울-하나-둘-셋-넷-하나아-두울
대부분의 불안은 깊은 심호흡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 길게 들숨과 날숨을 쉬어 보았지만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통제 받고 있다는 감각, 그리고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있다는 생각, 또 무력감 같은 것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다행스럽게도 주말이었다. 만으로 하루가 꼬박 지나자, 잔향감을 나타내는 리버브 그래프처럼 불안의 감도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마음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욕조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얼굴에 가볍게 로션과 크림만 바르고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사십 분 거리의 식물 스튜디오에서 마켓이 열린다고 해서 쇼핑을 하러 가기로 한 것이다. 익숙한 건널목을 건너 버스를 타기 위해 천천히 정류장으로 걸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차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흘러가는 것들.
‘11월인데도 날이 조금 덥네.’
날씨 생각을 하며 마켓에 도착했고, 식물을 하나 구입했다. 벨벳 질감의 커다란 잎에 감탄하며 조금씩 기분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주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그리고는 카페로 발걸음을 옮겨 지난 10월을 되새겨 보기로 마음 먹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감각적인 음악이 틀어져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공간의 비지엠에 시간을 맡겨도 좋았겠지만 집중하고 싶어 에어팟을 꺼냈다. 내가 선택한 음악은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슈베르트 앨범이었다. 손열음의 슈만을 듣다가 얼마전 피레스 선생님의 내한 공연에서 구입한 음반을 한번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같은 ‘슈’자 돌림이어서 였을까.) 집에 가서 꼭 씨디플레이어로 다시 듣겠다고 다짐하며 일단은 애플뮤직에 접속했다.
그리하여 내 귓가에는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와 카페 사장님의 취향으로 선곡되었을 밴드 아도이의 노래가 콜라보되어 울려퍼졌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의 메인 선율과 아도이 노래의 킥드럼 소리가 오묘한듯 절묘하게 어울렸고 그 두 음악이 마치 합주를 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백지노트에 좋아하는 펜으로 이런 사사로운 감상들을 적어 나가며 나는 마음 속 불안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마음은 여전히 폭풍우를 직격으로 맞은 나무처럼 축축히 젖어 있었지만 일단 그 폭풍이 그쳤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노트에 이런 미완의 문장을 적었다.
‘스스로를 치유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희성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마음은 어쩌면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마음 속에서 온갖 것들이 기어다니던 며칠을 나는 몇 잔의 화이트 와인과 맥주와 새로운 식물과 잠깐의 카페 나들이 그리고 좋은 음악들로 버텨냈다. 모두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예전의 나였다면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몰랐을 회복의 시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채워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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