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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민 Apr 01. 2020

네가 인정받아야 할 진짜 대상

어느 날 홍명보 전 국가대표축구팀 감독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많지도, 길지도 않았다. 정답에 가까운 말만 짧게 했다. 그런데도 솔직하고 힘이 있었다. 과연 어떤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일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 답하겠는가. 홍명보 전 감독의 대답은 이랬다. 아름다운 인생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이다. 정답에 가까운 말이라 생각한다.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예를 들어 인생의 목표를 사업의 성공이나 돈 많이 버는 것에 둔다고 생각해보자. 사업체를 얼마나 키웠고,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를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생각해보자. 안타깝지만 ‘돈’이 절대적 목표가 된다면 ‘성공’은 힘들다. 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냐고? 내가 돈이 없기 때문이다. 돈이 ‘많이’ 없으니 돈을 ‘아주 많이 벌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은 돈이 돈을 낳고, 돈이 결과를 만드는 시대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가?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살고, 통찰력 있게 살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솔직히 다 거짓말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선 우선 돈이 ‘많아야’ 된다. 돈이 많으면 상대적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통찰력도, 인문학적 사고도, 인격도, 실력도, 외모도, 학력도 아니다. 그냥 돈 그 자체다. 


아름다운 인생은 따로 있지 않다


앤디 워홀이 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말이 있다(실제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말도 있지만). ‘성공해라(예술 분야에서). 그러고 나면 네가 용변을 보아도 사람들은 (예술적 표현이라고) 박수 칠 것이다. 돈을 많이 가져라. 그러면 네가 뭘 해도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없다면 돈 많이 버는 걸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마라. 아무리 노력해도 돈 많은 부자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돈이 내 목표가 아니기에 행복하다. 홍명보 전 감독이 말했듯이 아름다운 인생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분야와 방식에 특정된 것도 아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다. 결과로만 말한다면 그건 ‘불의한’ 일이다. 출발선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열심히 훈련한다고 해서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는 대충 훈련해도 세계적 축구선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네가 진짜로 판단 받아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네가 진짜로 인정받아야 할 대상은 먼저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너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이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도 그 성공으로 아이의 존경을 살 수는 없다. 아버지가 돈 많은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자녀도 많다. 사회적 성공은 이뤘지만 온 가족이 반목하며 갈가리 찢어진 가정도 많다. 대기업 총수의 자녀가 자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다지 특출난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온 가족이 그 아버지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판단에 기대어 살아간다. 너를 평가하는 기준은 연봉도, 직위도 아니다. 너를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정이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너 역시 성공한 사람이다.


네게 맡겨진 일에서 인정받으라


두 번째는 너의 일이다. 네게 맡겨진 일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동네 일식집 사장님은 회전 초밥을 잘 말아낼 때 가장 아름답다. 주유소 아르바이트생은 새벽에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꿈을 키우며 일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 중학생은 중학생다울 때 가장 아름답고, 은퇴 후 집에서 콩나물을 키우는 할머니의 구부러진 손가락도 아름답다. 기준은 다름 아닌 너 자신이다. 네가 선택한 삶이 최고의 삶이다. 너의 인생이 세상의 다른 어떤 인생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다. 그건 바로 너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내가 최선을 다해 학생을 가르치는 이유는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내가 맡은 일이기 때문이다. 내 일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거다. 이 일을 해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전 성수동에서 얼굴마사지 기구를 조립하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가 있었다. 내가 너무 과하게 열심히 하니 사장님이 그랬다. 너는 왜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냐고. 하지만 내겐 그게 너무 당연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그건 내 일이니까. 내 이름이 걸린 일이니까. 그러니 대충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아르바이트라 해도 내가 맡은 이상 내 일이니까. 나는 남을 위해 일해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그저 나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거다. 


아서 밀러라는 희곡작가가 있다. 그의 대표작은 ‘세일즈맨의 죽음’이지만 ‘시련’이라는 작품도 유명하다. 그 작품에 다음과 같은 명대사가 나온다. “그건 내 이름이니까요!” 주인공 프락터가 교수형을 당하는 대신 그의 이름을 선택하는 장면이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트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묵묵히 존경과 존중의 마음을 표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가. 비록 아르바이트로 아줌마들이 쓰는 얼굴마사지 기구를 만드는 초라한 현실을 살아간다 해도 나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보지 않아도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그건 내 인생이니까, 그건 내 이름이니까 말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의 순간


세 번째는 바로 신이다. 너는 반드시 신과의 관계가 좋아야 한다. 물론 특정 종교를 언급하는 건 아니다. 여기서 종교는 ‘실존의’ 문제를 말하는 거다. 한 인간의 실존 문제가 풀리지 않고서는 인생 자체가 풀리지 않는다. 이건 내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나 역시 분명한 가치관이 잡히지 않았을 때는 인생의 목표도 없었고 삶 역시 무의미했다. 그러나 신앙을 통해 삶의 균형이 잡히자 놀라울 정도의 에너지가 발산되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실존이 무너지면 인생도 무너진다. 종교에 빠지란 말이 아니다. 너의 가치관의 바로 세우고, 살아가는 이유와 확신을 굳건히 세우라는 이야기다. 종교가 아닌 그 어떤 책도, 관념도 좋다. 한 번 정도는 죽음 직전까지 가면서 자신의 실존과 맞서는 경험을 하라는 말이다.


내겐 그런 경험이 있었다. 이것을 종교적 용어로는 어노인팅, 즉 기름부음이라고 한다. 실존이 확립되어야 한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순간이 있었는가? 자살을 결심한 적은? 지금 바로 그런 고통의 순간을 지나고 있는가? 신학자 헨리 나우웬이 언급했듯이 바로 그때가 실존적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의 순간이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의 모든 실존이 모조리 꺾인 그 순간에 너의 영혼은 물결친다. 요동친다. 춤을 춘다. 기회가 온 것이다. 번데기에서 벗어나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를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러니 실존적 고통을 영혼의 자유로 승화시키라. 젊은 날 자살 시도 한 번 안 해본 사람과는 인생을 말하지 말기로 하자.


단 한 사람의 인정만큼은 받아야 한다


마지막은 바로 너 자신이다. 다른 그 누구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의 인정만큼은 받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진다 해도, 가족이나 심지어 신에게 버림받는다 해도 괜찮다. 그러나 단 한 사람에게만큼은 버림받아선 안 된다. 그건 바로 너 자신이다. 너 자신은 언제나 너의 편에 서 있어야만 한다. 참 재미있는 연기론이 하나 있다. 바로 브레히트의 연기론이 그것인데 서사극의 이론적 근거인 ‘생소화 효과’를 연기에 적용한 것이다. 이것을 ‘게스투스’라고 한다. 이게 뭐냐 하면 배우가 연기하는 대상과 연기자 자신을 분리해 이중성을 갖추고 연기하는 방식을 뜻한다. 그래서 매우 유명한 말이 하나 나왔다. ‘연기의 이중성’이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과 나와의 관계도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있고,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어떤 연인보다도 가깝고, 사랑스럽고, 탄탄한 관계여야 한다.


나와 ‘게스투스’하는 내가 서로를 싫어한다면 어떨까? 그 사람의 인생은 너무나 황폐할 것이다. 하지만 지옥의 끝에 선다 할지라도 너와 게스투스하는 또 다른 너와의 관계가 좋다면 반드시 회복되고 살아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 내가 ‘피에타’라는 작품을 너무나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 악마 같은 강도 녀석도(이름이 강도다)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되니 죽어도(무덤 아래 세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 장면) 아름다운 거다. 죽음이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그런 기막힌 이야기는 바로 또 다른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 장면을 두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끔찍하며 가장 고결하고 숭고한 십자가 사건에 비유할 만한 장면이라고 언급했다.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방벽


우리는 우리 자신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지옥 끝의 억울한 일을 겪더라도 단 한 사람 너 자신만은 저주하지 말아라. 앞에서 연기적 이중성이란 말을 했지? 곰곰이 생각해봐라. 너 자신에 대해 생각해봐라. 네가 너를 봐라. 어떤가? 신기하게도 네가 보이지 않나? 네가 너를 볼 수 있지 않나? 네가 너 자신을 게스투스 할 수 있지 않나? 신기하지? 그렇다면 네가 너를 학대하고, 때리고, 욕하고, 무시할 수도 있고 네가 너를 안아주고 존중해주고,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게 이해되는가? 


반드시 너를 사랑하고 살아라. 이건 나르시시즘과는 다르다. 나르시시즘은 결국 남을 향한 거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을 편애하는 게 나르시시즘이다. 내가 말하는 건 남과 상관없고, 실존과도 상관없는 너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옥에서라도 너는 너 자신을 안아주는 그 품만은 거두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처참한 지옥,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실존적 지옥에서조차 자신을 안아주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결국 살아남았다.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방벽이 무엇일까? 만리장성? 콘크리트 요새? 아니다. 바로 너 자신이 안아주는 너만의 따뜻한 품이 만든 방벽이다. 세상 그 어떤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세상 최고의 요새이다. 이 요새, 한번 단단히 세워보면 어떨까? 널 존중할 자격이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너 자신이다. 이제 너 자신과 화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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