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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와이 Nov 02. 2021

정리의 왕도 (feat. 냉장고)

내돈내산 정리 후기

*표지사진은 ‘실리* 냉장고 정리용기 사진입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집에 , 아이를 아기 침대에

눕히고는,


이젠 뭐 해야 하는 거지?


라는 생각에 머뭇머뭇하던 그 어색한 순간이 떠오른다. 당시 아이 아빠는 주중엔 지방 출장, 주말에만 집에 돌아오던 때였기에(그마저도 일요일 오후엔 출근을 위해 출발해야 하는) 신생아 육아는 오롯이 내게 맡겨진 의무였다. 친정, 시댁 그 어느 곳에도 기댈 데 없이 첫 아이가 100일 되기까진 진심으로 ‘And then There were None’(‘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첫 아이가 무척 잘 자는 아이로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죽진 말고 버티라’고 내주신 한쪽 숨구멍이었다. 그리고 다른 쪽 구멍 하나는 바로...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블로그’.


때는 일반 핸드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던 과도기적 시대로 요즘의 ‘인플루언서’의 시조 격인 ‘블로거’가 뜨던 시절이었다. 어느 정도 수유와 아이 돌보기에 익숙해지자 이내 한 팔로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폰3를 잡고 인터넷 세상에 빠져들곤 했다. 전자파가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며 기겁하는 남편의 비난 섞인 우려가 이해 안 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때의 나’는 삶의 망망대해에 겨우 목숨 붙이며 부유해있는 존재였고 요 구멍으로나마 열심히 ‘사회적 숨’을 쉬어야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다, 고 변명해 본다.


특히나 이제 막 ‘살림’의 세계에 들어온 나로선, 이 세계의 무림고수들 같은 존재들에 홀딱 빠져들어 버렸다. ‘그 언니’들이 기꺼이 열어 보여준 그들의 살림은 더 이상 구질구질한 뒤치다꺼리가 아니었다. 윤이 나고, 각이 잡히고, 아름다웠다. 가장 충격이었던 것은 냉장고였다. 그들의 냉장실엔 통일된 디자인의 반찬통들이 마치 병정들처럼 일렬종대로 그날의 식탁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냉동실엔 고운 글씨로 날짜가 라벨링 된 먹거리들이 우아하게 보급품을 쟁이고 있었다. 이 물건이 뭔지, 언제 냉장고 안으로 들어갔는지 기억도 안나는 ‘내 냉장고’와는 마치 다른 세계 존재 같았다. (심지어 냉동실 한 칸은 남은 모유 얼린 것으로 꽉 차 있었다.) 그렇게 현실과 이상의 대조가 심해질수록, 열정을 가장한 열등감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저녁 무렵, 아이를 깊이 재우고 나면 일명 ‘잠자기 아까운 그 시간’이 시작된다. 냉장고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재고, 각각의 위치에 무엇을 어떻게 보관하고 어떤 수납 방법을 사용할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무엇을 넣을지 계획이 세워지자 이제 수납할 통을 사고, 그 통을 넣을 바구니를 사고, 심지어 각 용기에 넣은 재료를 일부러 구매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계획에 따라 소분하고 얼리고 저장했다. 심지어 ‘가루류 영역’을 완성하기 위해 밀가루 봉지마저 일부러 저장용기에 털어 넣기도 했다. 블로거 언니들이 몸소 열어주는 ‘공구’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완성한 내 냉장고는 묘하게...(필연적으로) 인위적이었지만 어쨌든 뱁새로서 가랑이를 찢을 수 있을 만큼 찢은 거였다. 이상하게 블로거 언니들이 보여준 그 느낌이 안 살아나는 이유를 생각해보다,


냉장고 브랜드가 달라서 그럴 거야. 냉장고부터 바꿔야 하나?


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들었다. 여차저차 ‘냉장고 프로젝트’를 뜨겁게 한 판 끝내고 나니, 다소 풀이 죽어 소강기에 들어갔다. 당연히 냉장고 속 물품을 정리해놨다고, 사용 빈도가 달라지는 게 아니다. 여전히 어떤 건 자주 쓰였지만, 어떤 건 예전처럼 그대로 묵어갔다. 그리고 정리용기로 빈틈없이 채워진 냉장고는 Ad-hoc(그때 그때 생기는 일)을 소화하기에 모잘랐다.


이러다 결국 터져 나온 남편의 불만,


우리 집엔 정리하는 통만 있고 먹을 게 없어!


근래 몇 년간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는 관심이 쏟아졌다. 이에 대한 미디어의 조명은 물론이고 관련 서적이 범람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소위 ‘당근 한다’(당근 마켓을 통해 안 쓰는 물건을 정리한다)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내가 전문적인 견해를 감히 내진 못하지만, 나의 시행착오가 누군가에겐 타산지석이 되기를 바라본다.


버리기 전에 사지 말아라


정리된 살림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물건 수를 한정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인지능력이란 것이 생각보다 지속기간이 짧고, 범위가 좁아서, 나름 기억력에 자신이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물건들의 인해전술, 아니 ‘물해전술’엔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이 통제할 물건들을 한정하기 위해 많은 미니멀리스트들은 ‘버리기’부터 시작하라고 한다. 이는 맥시멀 라이프에서의 변화를 꾀하기 위한 거였기 때문이고, 살림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기론, ‘버리기 전에 사지 말아라’라고 말하고 싶다.


필요할 때, 필요한 물건만 딱 사는 것,부터 정돈된 살림이 시작된다. 신혼살림 단 두 명인데, 6인조 식기세트를 과하게 마련할 필요가 없다. 또 살림을 하다 보면 그릇에 대한 관점도 달라져서, 그 때야 내 취향이 뭔지 깨닫게 된다. 아이들을 키워본 사람으로서 단언컨대(사실 후회하건대) 육아용품조차 ‘내복 몇 벌, 가제수건 10장, 물티슈, M사이즈 기저귀’ 정도 준비하면 된다고 단언한다.

모든 것은 필요가 생긴 그 순간, 마련하면 된다.


안 보이는 것은 통제되지 않는다


사놓고 까먹고 또 사고, 1+1이라고 사놓고 하나 쓰고 또 사고, 박스로 사놓고 박스를 못 찾아 또 사고...’ 골방’과 ‘창고’는 ‘물건들의 개미지옥’이 되기 십상이다. 물건들 역시 쓰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유통기한을 넘기는 일도 부지기수이다. 내가 보이는 데 있지 않는 물건은 쉽게 내 기억에서 잊힌다. 나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눈에 재고 상황이 ‘보이도록’하자.


대량 구매를 피하고, 다 썼을 때 사자


유통기한이 길다고 느껴지는 세제류의 경우,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통기관에서도 약간의 가격 메리트를 제시하며 대량 구매를 유도한다. 하지만 난 대량 구매를 피하는 것도 가격 할인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간 한 가지 세제 냄새만 맡는 것도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매일매일 좋은 물건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하나의 브랜드를 써보고 다른 브랜드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을 다 쓰고 다음엔 어떤 걸 써볼까, 하는 소비의 즐거움도 느껴보는 거 어떨까.


냉장고에 대해서


예상치 못했던 해외생활을 하게 된 덕분에, 한국에 냉장고와 애증의 정리용기 모두를 두고 오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이 살림을 시작하며, 12년의 살림살이 중 가장 통제된 냉장고 환경(?)을 조성되었다. 아이러니하게 이는 ‘냉장고 정리용기’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매일 음식을 만드는 삶’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준 성과이다. 심지어 극단적으로 코로나로 인한 극심한 락다운을 겪으며 장 보러 가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던 생활을 해보며 냉장고와 찬장 안에 있는 몇 안되어 보이는 재료로도 몇 주는 끄떡없구나, 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가장 좋은 것은 자주 장을 봐 먹어 치우고 또 필요한 것을 사는 것 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니 기본재료(물, 계란, 유제품, 양파 마늘 감자 대파, 쌀, 육류, 빵류)+주중 식단에 필요한 특별 재료로 먹거리 쇼핑리스트를 한정해보자. 그 후 있는 걸로 어떻게든 버텨보며 냉장고와 찬장이 텅텅 빌 때까지 장을 보지 않는 것이다. 비어 가는 냉장고는, 정리용기와 식재료로 꽉 들어찬 냉장고 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이렇게 ‘라떼는 말이야...’식의 이야기를 늘어놓아봤지만 여전히 내 통제 안에 있는 물건들도 끊임없이 매만져주어야 정리된 느낌이 든다. 살림은 손댄 티는 안 나고, 손 놓으면 티가 확 나는 가성비 안 좋은 활동임에 분명하다.


과거의 내가 열정적으로 ‘퐐로우’하던 살림 선배님들 중 일부는 결국 탈세와 광고 논란 등으로 큰 곤혹을 겪었다. 일에서 쏟아야 할 열정이 방향을 잘못 잡아, 살림도 일처럼 프로로 해보고 싶었던 열등감 넘치던 살림 초보꾼은 작은 깨달음을 얻고 요즘은 블로그 안 들여다본다고 한다.


그거, 결국 다 물건 팔려고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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