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하네케는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영화에서 진실에 접근하려 노력했다'라고 말한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관객에게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서사의 흐름 이전에 말해주고자 하는 어떤 메세지가 우선시된다. 관객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드는 미카엘 하네케의 2017년작 <해피 엔드>도 그가 말하고픈 불쾌한 진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해피 엔드>는 그런 점에 있어 '시선'의 진실이라 할만하겠다.
<해피 엔드> 메이킹 스틸샷
<해피 엔드>는 동영상 촬영을 하는 스마트폰 화면으로 시작된다. 자신의 엄마를 찍는 화면 옆으로 엄마가 할 다음 행동이 채팅으로 올라온다. 다음은 햄스터에게 우울증 약을 먹이는 동영상과 자신의 엄마에 대해 느끼는 거친 감정들이 채팅으로 올라온다. 처음 보면 누가 채팅을 치고 있는지, 누굴 찍고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지만, 이후 찍고 있는 사람이 에브, 찍힘을 당하는 이는 에브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이 사실을 모른다 하여도 영화 처음에 나오는 스마트폰 화면에 비친 장면들과 채팅들을 보다 보면 조금 무섭게 느껴진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햄스터에게 우울증 약을 먹이고, 엄마의 행동을 뒤에서 도촬하고 있으며, 마지막은 '이제 구급차를 불러야겠다'라며 차갑게 말하는 모습은 이미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더라도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넘어오면 싸늘한 감정, 그 감정은 에브가 실질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지만 스마트폰 화면에 비치는 모습은 에브의 채팅에 비해 관조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해피 엔드>는 그러한 감정과 시선의 부조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해피 엔드>를 세 가지의 요소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해피 엔드>의 인물들이 겪는 각자의 '사건'들, 그 사건들의 책임 혹은 속해 있는 '당사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을 바라보는 '관찰자'이다. <해피 엔드>의 '사건'이라면 영화의 처음 cctv에서 나오는 사고 현장 장면이 있다. 갑자기 무너져 내린 벽면에 의해 사람들이 다치게 되는 사건으로 인해 앤과 그의 아들 피에르가 소환된다. 그들은 사고가 난 공사 현장의 책임자로서 현 사건에 대해 원인과 처후를 파악하고 행동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고라는 사건의 (피해자는 아니지만) 당사자의 위치에 놓여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cctv 장면 다음으로 오는 씬은 앤이 사고 때문에 연인과 약속을 미루는 장면이다. 그때 앤의 말투나 대사를 살펴보면 사건에 대해서 골칫거리라 생각할 뿐 이에 대해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사고 소식을 듣고 난 이후 어느 순간에도 그들은 당사자로서 제대로 활약하지 않는다. 적당히 책임을 피하려 하고 사건의 처분에 대해서도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답한다. 에브의 아버지 토마와 에브 역시 마찬가지다. 토마는 자신의 전처가 죽었음에도 영화 어디서도 죽음에 대하여 감정을 내비친 적이 없다. 그리고 에브는 토마가 자신을 데리러 나온 차 안에서 울음을 터트리지만 그 감정은 어떠한 사건과 닿아있지 않는다. 관객은 에브가 흘리는 눈물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해피 엔드>의 인물들은 사건과 결코 가깝지 않다.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고 있으며, 영화의 시선은 그것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관객은 '관찰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선과 사건들로부터 필연적으로 거리가 있다. 스크린이라는 1차적 거리감이 있지만 미카엘 하네케는 그 거리감을 더더욱 부각시킨다. 일부러 스마트폰 화면이나 cctv 화면을 사용한다던가, 인물들이 겪은 어떤 사건들은 아예 보여주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관객을 철저하게 '관찰자'의 위치에 놓는다. 이처럼 <해피 엔드>는 '사건'과 '당사자', 그리고 '관찰자'까지 각 요소들은 서로 간에 상당한 거리를 갖고 있다. 사건에 대한 당사자들은 사건과 동떨어 있고, 사건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은 어떠한 심적 개입도 이루어지기 어렵다. 각자의 인물들이 서로를 타자화 시켜놓은 듯한 이런 형태의 연출은 영화를 보는 관객도 타자화된 시선에 참여시킨다. 그래서 <해피 엔드>는 심적 개입이 아닌 분리로써 활동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멀리서 찍은 롱테이크 장면으로 인물들의 대사,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만든다.
창 밖에 매가 비둘기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모습을 보았다고 조르주가 에브에게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텔레비전으로 보면 아무렇지 않은 장면인데, 실제로 보면 손이 덜덜 떨려.' 조르주의 말처럼 <해피 엔드> 속 인물들은 모두 세상을 텔레비전으로 보는 사람들 같아 보인다. 인물들은 자신이 속해있거나,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건에 대해서 거리를 둔다. 그들과 사건 사이에는 큰 공백이 있고, 미카엘 하네케는 '미디어'라는 요소로 공백을 표현한다. 실재를 둔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요소, 미디어는 실재 사건에 대해 인물들이 무덤덤하게 만든다. 마치 눈 앞에 비둘기가 갈가리 찢기고 있음에도 아무런 미동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선을 공유하는 것을 앞서 이야기한 대로 관객 또한 일종의 '관찰자'의 위치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관객도 <해피 엔드>의 인물들처럼 사건을 '객관화' 혹은 '타자화' 시키는 시선에 참여하도록 하여 그러한 시선의 참가자로서, 관찰자로서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하얗고 투명하고 비현실적이다.
<해피 엔드>는 끊임없는 타자화의 영화다. 사건, 인물들로부터 인물 혹은 관객이 타자화를 하도록 만든다. 에브가 자신의 엄마, 아빠와 타자화를 시키고, 토마는 불륜녀를 타자화로 합리화시킨다. 끊임없이 객관화, 타자화를 시켜 냉소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도록 하는 미카엘 하네케의 수법은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른다. 조르주가 휠체어에 앉아 점점 바다로 들어가며 자살시도를 한다. 에브는 조르주의 자살시도를 영화의 처음 장면처럼 스마트폰으로 찍기 시작한다. 관객은 에브의 카메라를 통해 조르주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때 갑자기 앤과 토마가 달려온다. 본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앤과 토마가 조르주에게 달려가는 도중 앤이 에브를 잠깐 쳐다본다. 앤은 에브를 바라본 것이지만, 필자는 앤의 시선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자살시도를 하고 있음에도 카메라로 촬영하는 모습은 결코 올바른 시선이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관객은 에브의 시선, 타자화 시키는 시선을 영화를 보는 내내 함께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에브에게 향하는 앤의 시선을 관객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런 의미로 <해피 엔드>를 보며 어떤 차가움과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타자화를 시키는 시선에 대해 익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디 <해피 엔드>가 끝까지 불편한 영화로 남았으면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