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염이라는 불편한 손님
제주에서의 보름간의 여름휴가. 이렇게 다소 긴 여행을 가기 전에는 이런저런 바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골라 둔 숙소나 식당이 사진으로 본 것처럼 괜찮은 곳이어야 할 것. 예약해 둔 비행기나 배편의 출발을 변경시키게 되는 기상 현상이 없길,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보내는 여행의 날들이 모두 즐겁게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다.
그중에서도 나 스스로 컨디션을 잘 유지해서 여행 가기 괜찮은 상태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이번 제주 여행을 앞두고 나는 다소 무리를 한 것인지 제주에 도착하고 나서 이틀째 아침부터 목이 불편해졌다. 커피를 마셔도 목이 쓰리고, 좋아하는 고등어회나 딱새우회는 먹지도 못하겠고, 눈앞에 푸른 바다를 보고도 물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이것은 아무래도 불편한 손님이 찾아오는 신호다. 바로 해마다 두어 번씩 불청객으로 등장하는 편도염.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마 편도염이? 겨울마다 지독한 편도염으로 고생했는데 이번엔 여름이잖아. 아닐 거야. 걱정하면서 나는 병원을 찾았다.
제주시에는 이런저런 병원이 많았지만 내가 머물렀던 제주 동부 시골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은 세화읍내에 있었다. 이름은 세화 의원. 찾아보니 숙소에서 차 타고 10분 내외다. 나는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이른 시간에 병원을 찾았다. 병원의 첫인상은 오래된 드라마의 세트장 같았다. 이 병원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후 한 번도 리모델링 한 적 없이 청결하고 친근하게 잘 유지된 느낌이었다. 커다란 글씨의 병원 현판과 병원 안내문을 보니 아주 어릴 때 엄마 따라 주사를 맞으러 갔던 병원이 떠올랐다. 그때의 병원 냄새가 나는듯했다. 나는 윤기가 반짝반짝 나는 기다란 나무 의자에 앉아 나의 순서를 기다렸다. 이내 내 이름이 불리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흰머리의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었다. 오래된 청진기를 들고 계셨고 나의 몸 상태를 물어보시고 입 안을 보시더니 군데군데 하얗게 헐어있는 모습을 보시곤 편도염 약을 처방해 주셨다. 나는 갑자기 시간을 거슬러올라 어린 사람이 된 듯하였다. 옆에 젊은 엄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처방전을 받아 바로 아래층에 있는 약국에 갔는데 약국 또한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튼튼한 나무 장에 약들이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고 약사님 역시 연세 지긋하신 친절한 분이셨다. 나는 자동 약포장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윤이 반들반들하게 나는 오래된 나무 분류 트레이에 약을 넣어 수동으로 포장하는 약사님의 모습을 구경하였다.
다음날 일어났는데 목이 더 많이 헐었다. 이제는 물을 삼키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편도염도 아플 만큼 아프고 나야 낫는다. 그렇지만 기다릴 자신이 없는 조급한 마음에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목을 보시더니 이거 잡수면 좀 더 나을 거라며 추가 약을 처방해 주셨다. 다시 약국에 가니 약사님도 "목이 많이 부었나 보네. 가글을 좀 더 해봐요" 하시며 어제 봤다고 감사히도 아는 표시를 해주신다. 이 친절함은 무엇인가. 나는 병원과 약국을 나서며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편도염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그날 이후 나는 약을 먹고 며칠간은 잠을 실컷 잤다. 눈을 감았다 뜨면 오전 한 나절이 훅 지나가 버리고, 오후 한 나절이 또 훅 지나가버렸으니. 그러고 나서는 커피도 마시고 좋아하는 고등어회와 딱새우회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 바다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달력을 보니 보름 휴가에서 며칠이 훅 지나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목에는 더 이상 편도염의 흔적은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편도염은 가고 세화 의원과 약국의 따스함만 남았더라. 남은 제주의 일정도 그 덕분인지 하루하루가 반짝거릴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