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미아 Jul 18. 2020

#8. 고개 숙인 남자의 방학

1.5년의 두바이 생활의 기억


"그때? 그때 너무 좋았지.

외국에서 처음 생활해 보니까 뭔가 설레기도 하고 좋았어, 근데 그건 좀 싫었어..."

우리 둘 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몇 년만의 남편의 고백으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남편도 나도 또래에 비해 회사 생활을 조금 늦게 시작했지만, 착실하게 다니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국에서의 6년 반 정도 회사생활을 마치고 두바이로 왔고, 그 이듬해 경력 7년 차 남편도 회사를 그만두고 두바이로 옮겨왔다. 잠시 쉬어도 되니 같이 외국에서 살아보자는 의미로, 그래서 남편도 잘 적응하고 취업이 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조금 쉬면 뭐 어떠랴라는 가벼운 생각이었다.


매사에 긍정적인 남편은 즐거운 마음으로 회사에 사직서를 냈고, 송별 파티를 하고, 7년 노동에 대한 선물로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군필자가 동생과 신나게 동남아 배낭여행을 하고 바리바리 짐을 싸서 두바이로 들어왔다.






이미 여러 번 방문한 곳이었지만, "산다"는 느낌으로 비행기를 타고 것이라 느낌이 새삼 달랐다. 설레는 두근거림이 심장 대부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살게 된 외국, 두바이에서 20대 때 해보고 싶어 말만 몇 번 꺼내보았던 일들을 시작했다.



대학생 때 다들 가던 유럽여행, 워킹홀리데이니, 어학연수니 하는 것들은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딱히 기회도 없었거니와,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부모님이 하셨던 현실을 보라는 이야기가 너무 크게 느껴져 더 이상 우겨서 내 멋대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랍국가지만 워낙 다양한 국가에서 모이는 도시인지라, 두바이엔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각지의 사람들이 있었다. 영어학원을 등록했고, 하루에 아침 시간은 한국인 꼴랑 하나밖에 없는 찐 외국인 그룹에 끼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영어를 평소에 잘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더 못하는 노랑머리 외국인들 사이에서 자신감을 얻어나갔다.


그리고 저녁에 와이프를 픽업하러 가면, 매일 그렇게 물었다. 오늘은 뭐 배웠어?

이상하게 학원에서는 선생님이랑, 반 동기들이랑도 이야기 잘했는데, 그렇게 와이프 앞에서는 그렇게 발음도 꼬이고 문법도 엉망진창이다. 일장연설이 늘어지지만, 집까지는 고작 10분. 이 정도쯤이야.



오자마자 수영 레슨도 시작했다. 호텔까지 초행길인 데다 또 외국인한테 배우는 것이라서 어찌어찌 수영장 문 앞까지 왔지만, 레슨 첫날 왠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당 레슨 가격을 생각하면 안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용기를 내서 들어간 순간, 사실 나의 몸엔 돌고래의 유전자가 있는 게 아닐 정도로 즐기고 있었다. 레슨시간은 끝났지만, 혼자서 물놀이를 하면서 또 다른 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했고 좋았다. 노곤.



매일 혼자 갖는 카페에서의 여유시간도 좋았다. 이븐 바투타 몰에 있는 높은 천장이 이국적인 스타벅스에 가서 매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한두 시간 정도 커피 명상 시간을 갖고 집에 돌아왔다. 나중엔 바리스타들이 먼저 알아보고, "Sir, 아이 노 왓 유 원"이라는 얼굴로 주문을 하기도 전에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주말에 가끔 갔던 두바이 가락시장도 좋았고, 쇼핑몰도 바닷가도 좋았고, 운동 겸 재미로 하던 스쿼시도 좋았다. 그냥 낮에 운전하면서 여기저기를 다니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시간 부자였다.






그런데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나와 와이프 둘만 있으면 좋았지만, 다른 한국 사람들 혹은 가족들을 만날 때는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모든 가족단위에 낀 한국 남자들은 여기에서 일하고 그의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싫고, 당연히 아쉬운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7년의 경력이 있는 나였지만, 그것은 과거의 나의 모습이었을 뿐이니까, 덧붙일 이야기가 딱히 없었다. 그래서 불편했다. 아무리 붙임성이 좋은 나지만, 왠지 내가 그 사람들 앞에서 작아진 느낌이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이런 모임은 점점 줄었다.



그리고 두바이에서 1년의 시간이 지나갈 때쯤, 나도 알고 있었다. 슬슬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몸은 너무 편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고 가슴은 답답한 시간이었다. 와이프도 이제 남편이 결정을 하거나, 혹은 필사의 노력을 하거나 해야 할 시간이고, 방학은 끝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을 건넷을 때, 순순히 응한 것은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간간히 왔던 출처를 알 수 없는, 아마도 일부는 이력서를 낸곳에서 면접을 보자고 왔었을, 외면했던 번호들이 고파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땐 어쩔 수가 없었다. 대면보다 전화통화는 나에게 하나의 두려움이기도 했으니까.




 

사실 나는 정확히는 몰랐다.

최근에 "나는 노동의 소중함을 너무나 알아서 이제는 예전처럼 두바이에 없다"라고 했을 때 무슨 의미였는지. 다른 한국인 가족들을 만나고 다른 남자들을 만났을 때 작아진 모습이 아직도 가끔 기억나서 지금도 내가 다른 사람 눈을 잘 못 본다며 농담을 건네지만, 그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내가 괜찮은 것과는 별개로 당사자인 남편은 그 순간에 괜찮지 않았었는데, 나는 잘 몰랐다.



지금이라도 이야기해줘서 다행하고 고마운 일이고, 한편으로는 나는 집에 자발적 노동인구 1은 획득이 되었으니 그럼 나는 다른 일을 좀 해볼까 하고 가정 내 경제적 역할에 대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는 또 다른 노동인구 2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7. 코로나 시대, 장거리부부의 고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