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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마지막

그날의 기록

국민학교 3학년이 되는 첫날이었다.

반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에 나는 마땅한 특기나 재주가 없어 별명을 얘기했다.

그 별명은 실제로 아이들이 지어준 게 아니라 내가 급조한 별명이었다.

"제 별명은 키가 커서 [키다리]입니다."

라고 말했지만 그 이후에 누구도 나를 키다리라고 부르진 않았다.

그 정도로 인상 깊게 키가 크지 않았거나 내 소개가 금방 잊힐 만큼 평범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평소와 다르게 아빠는 깨어 있었다.

술 취해 잠들지 못할 만큼 아픈 상태였다.

아빠는 이불속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방바닥에 선명하게 붉은 액체를 토해냈다. 피였다.

나는 바닥을 닦아내고 피 묻은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다른 이불을 꺼내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아빠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플라스틱 휴지통을 비워 다음에 토할 때 사용하라는 의미로 아빠에게 갖다 주었다.

순전히 청소가 힘들어서였다.

아빠는 또다시 빈 휴지통에 한참을 토하고 나서 목이 마르다며 술을 마시고 물도 마셨다.

그사이 나는 휴지통을 비우고 깨끗이 씻어서 다시 아빠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아빠는 마시고 토하는 일을 4번 이상 반복했고 나는 주전자에 물을 채우거나 휴지통을 비우는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우리 사이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따금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내는 아빠의 신음 소리만 정적을 채울 뿐이었다.

그렇게 아빠의 생애 마지막날은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녁에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잠깐 들르셨다가 그 광경을 보고 엄마에게 연락해야겠다며 외갓집으로 뛰어가셨다. 그리고 외삼촌이 오셔서 급히 아빠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그날은 아빠도 엄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종일 피가 튄 방바닥을 닦아내고 아빠를 수발하느라 힘들었는지 아니면 폭군 같은 아빠가 없어서 마음이 편했는지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두려움도 없이 나는 곯아떨어졌다.




"고모부가 돌아가셨데..."

다음날 아침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촌언니가 우리 집 현관을 열며 울먹거리듯 말했다.

평소엔 거의 만나기 힘든 큰 언니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우리 집을 온 게 맞나 싶어 눈만 꿈뻑꿈뻑했다.

그러다 고모부가 우리 아빠를 지칭하는 말임을 깨닫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이 멍해졌다.

'이렇게? 갑자기? 진짜로?'

정말이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자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아빠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과 그 사실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거기다 언니가 너네 아빠, 술꾼이 아닌 정식 호칭을 불러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까지. 처리가 안 됐는데 자꾸만 새로운 감정들이 밀물처럼 덮쳐왔다.

언니의 그렁그렁하던 눈에서 눈물이 투두둑하고 떨어졌다.

언니한테 우리 아빠의 죽음이 가족을 잃은 그런 종류의 슬픔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보다는 죽음 자체가 가진 상실과 고통, 그 순간만큼은 아빠를 잃은 어린 동생들이 불쌍해서였을 거라고 나는 미루어 짐작했다.

나도 그저 일그러진 언니의 눈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따라 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 학교는 못 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선생님께 연락을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학교 전화번호도 모르고 어제가 3학년이 된 첫날이었으니 아는 친구도 없었다.

외숙모는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갑인 사촌에게 선생님께 말씀드리라고 전달해 두겠다고 했지만 내 아빠의 죽음이 내 의도와 다르게 국민학교 3학년 남자아이의 입으로 대충 전달되는 게 싫었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내 이름만 말해서는 내가 누구였는지 알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외숙모가 나와 내 동생을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준비를 할 동안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제 별명이 키다리라고 소개했던 OO이에요."

선생님이 나를 기억해내주기를 바라며 내가 지어냈던 별명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았다.

나는 마치 오늘 집안에 가벼운 일이 생겨 학교를 못 나가게 된 것처럼 일상적인 어투로 아빠의 죽음을 설명했다. 아빠의 죽음이 선생님께 너무 무거운 주제가 되어 나중에 받게 될 과한 위로를 미리 방지하고 싶었다.

편지봉투에는 3학년 3반 선생님께 라고 써서 다른 반으로 전달되더라도 원래 이 편지의 주인에게 무사히 전해질수 있도록 받는 사람을 한번 더 명시했다.


그러고 나서 외숙모와 택시를 타고 아빠의 장례식이 마련된 한독병원으로 갔다.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외숙모는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내가 보낸 어제에 대해 엄청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셨다.

 "세상에 요 어린 아가 즈그 아빠 피를 다 받아냈다 아임 니 거. 방바닥도 지가 다 닦고"

나는 내가 어제 한 일이 처음 보는 사람도 감탄할 만큼 숭고하고 어른스러운 일이 된 게 겸연쩍었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아이고" 하며 탄식할 때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어젯밤 아빠를 잃은 불쌍한 처지의 아이가 된 것도 불편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상복을 입은 매우 지쳐 보이는 엄마가 있었다.

거기서도 외숙모는 아침에 내가 선생님께 편지를 쓴 일에 대해 열변을 이어나가셨다.

"야가 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즈그 선생님한테 편지를 썼다아이가. 아빠가 돌아가셔가꼬 학교를 못 간다면서.."

엄마를 보고도 특별하게 더 반가워하거나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아빠의 마지막을 선명한 피의 색으로 기억하면서도 감당 못할 만큼의 서러운 마음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남은 우리 세 식구는 각자 단단해져서 자기 몫을 다하고 혼자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른들은 바빴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많이 왔고 추도예배를 드렸다.

말이 없고 항상 혼자였던 아빠가 죽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게 신기했다.

목사님이 "이 불쌍한 영혼을 주님께서 거두어 주시고..." 하며 기도할 때는 처음으로 아빠가 가여웠다.

엄마는 외삼촌과 함께 아빠의 임종을 지켜봤다고 했다.

"엄청 아파가지고 고통스러워하드만 갑자기 얼굴빛이 환해져가꼬.."

아빠가 임종했을 때 얼굴이 환해지고 웃더라면서 아마도 천국에 갔을 거라고 엄마는 말했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천국에는 술 따윈 없을 테니 거기서는 술 안 먹고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화장터로 가는 아침에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남은 친척들과 우리 가족을 싣고 버스는 한참 동안이나 달려서 주변이 온톤 논과 밭인 곳에 다 달았다.

화장터는 넓은 공터와 그에 비해 작아 보이는 건물이 있었고 매점으로 보이는 간이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

나와 남동생은 버스 안에서 아빠의 관이 화장장 건물로 옮겨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러 명의 어른이 버스 뒤편에서 아빠를 옮겼고 그들은 꽤 힘이 들어가 보였으며 그와 대조적으로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엄마가 그 뒤를 따랐다.

아빠가 마침내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갑자기 엄마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몸을 가누지 못해 몇몇 어른들이 엄마를 부축했지만 엄마는 다리가 풀어진 듯 주저앉아 버스 안까지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 지르며 울었다.

마지막까지 간신히 엄마를 지탱하던 어떤 힘이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 버린 거 같았다.

10여 년을 함께한 배우자를 보내는 슬픔이었는지,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두고 무책임하게 먼저 떠나버린 아빠에 대한 배신감이었는지, 지긋지긋하게 고생한 지난날의 회환이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뭉뚱그려진 울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나는 아빠의 죽음 이후로 처음 보는 엄마의 깊고 어두운 슬픔을 버스 안에서 숨죽여 바라보았다.


화장을 하는 시간은 꽤 길었다.

몇몇 어른들은 간이 매점앞 평상에 앉아 술을 드셨다.

남동생은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갑갑했는지 제법 큰  공터를 뛰어다녔다.

나도 동생을 따라 뛰면서 오랜만에 공기가 신선하구나를 느꼈다.

그 모습을 본 어른들은 "어이구 즈그 아빠 죽었는지도 모르고 저래 뛰댕긴데이.." 라며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속뜻을 알만큼 커 있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말하고 나자 나는 슬퍼야 할 이 상황이 별로 슬프지가 않다는 걸 깨닫고 당황스러웠다.

그런 내 마음을 들킬까 두려웠고 차라리 아빠의 죽음이 주는 의미 따위는 모르는 철부지 아이로 취급받는 편이 나을 거 같았다.

그래서 슬픈 척 연기하기보다는 지금처럼 슬프지 않은 내 모습이 철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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