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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선 Mar 28. 2024

고요함과 울림 사이, 몸을 드나드는 숨

두산 큐레이터 워크숍 기획전: #2 (두산갤러리)


소리가 날 때도, 소리가 나지 않을 때도 숨은 몸을 드나든다. 그 때문에 고요한 가운데에도 숨은 목소리의 가능성을 안다. 몸을 드나드는 숨처럼 텅 빈 전시장을 드나들면서 공간이 낼 수 있는 소리를 상상하는 이들이 있다. 전시 《#2》의 기획자들은 빈 곳으로서 전시장이 가지는 가능성에서 시작해 그 공간이 어떻게 채워지고 다시 비워지는지를 실험한다. 그리고 채워짐과 비워짐 사이에서 공간을 오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위치를 질문한다. 첫 번째로 질문을 받은 이는 배해률이다.

     전시에 참여한 다섯 작가 중 배해률은 희곡 단편 「염소구제작업」으로 전시에 참여했다. 배해률 외의 네 작가 곽소진과 리에 나카지마, 이경민과 정철규는 배해률의 희곡의 한 부분인 ‘2장(#2)’과 ‘시놉시스’를 읽고, 희곡을 각자의 시선으로 해석하여 작업으로 풀어냈다. 이러한 시도는 전시를 기획한 세 사람 이미지, 이민아, 이민주의 기획 의도와 맞닿아 있다. 세 사람은 ‘Theater’의 어원 ‘Theatron’이 ‘관객이 바라보는 장소’를 의미하는 동시에 ‘바라보는 행위’를 의미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전시에 참여하는 다양한 주체에 의해, 배해률의 희곡과 네 참여 작가의 작품은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가 ‘바라보는 장소’가 된다. 전시 공간에 이야기를 풀어내는 배해률의 시선과, 배해률의 희곡을 바라보는 네 사람의 시선, 작품을 보는 관람자의 시선이 한 공간에 공존한다. 독특하게도 《#2》는 전시 공간이 다시 텅 빌 때 비로소 완결된다. 전시가 마감된 뒤 발행되는 도록에는 전시의 시작점이 되었던 배해률의 희곡이 수록되는데, 여기서 네 작가에게 단서로 기능했던 희곡의 2장은 텍스트 대신 전시 전경으로 대체된다. 전시의 완결은 전시를 감상하며 2장의 텍스트를 문자가 아닌 감각으로 독해하는 관람자의 몫이 된다.

     이 글은 배해률의 희곡 「염소구제작업」을 시작점으로 전시의 흐름을 읽고, 각 작품이 희곡을 변주한 지점을 살핀다. 여기서는 배해률의 희곡을 작업을 추동하는 역할로서 ‘속삭임을 듣는 귀’로 보고, 이를 변주하는 네 작가의 작업을 속삭임을 울림으로 만드는 ‘진동’으로 바라본다. 끝으로 이러한 과정의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하는 ‘빈 곳으로서의 전시장’을 기억하며 전시장을 오가는 이들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요의 틈에서 속삭임을 듣는 귀

배해률은 비어있는 전시 공간으로서 ‘텅 빈 곳’을 희곡의 출발점으로 제시받는다. 작가가 텅 빈 전시장에서 떠올린 것은 무언가 있다가 없어진 ‘부재’의 감각이다. 부재란 ‘존재는 하나 여기에는 없는 무엇’을 상정한다. 부재하는 그 존재를 아는 자에게 부재자의 빈자리는 고요함 속에서도 그 목소리를 듣게 한다. 배해률은 대부분의 사람은 들을 수 없지만, 부재하는 그 존재를 아는 누군가는 들을 수 있는 어떤 속삭임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희곡은 염소 구제 작업을 위해 섬을 찾은 ‘여래’의 죽음과 그 죽음을 목격한 ‘우진’과 ‘이웃’의 죄책감을 배회하며 시작한다. 희곡이 시작하는 시점으로부터 5년 전 ‘여래’와 ‘우진’은 염소 구제 작업을 하러 섬에 왔었다. 이때 ‘여래’가 절벽 위 염소를 쫓다 떨어져 사망하게 되는 사고가 일어나고 우진은 사고를 책임지기 위해 직책을 내려놓는다. 5년 뒤 현재 시점에서 ‘들레’와 ‘영신’은 섬에 남은 염소들을 마저 이송하기 위해 섬을 찾는다. 섬에는 이름 모를 주인들이 무책임하게 방치해 온 염소들이 있다.

     절벽에서 위태롭게 손을 내밀던 여래의 손을 잡지 못한 ‘우진’의 마음. 자신의 누이를 섬 바다에서 잃고, 한눈을 판 사이 그 누이의 손녀를 우물에서 잃고, 섬의 절벽에서 여래를 잃은 ‘이웃’의 켜켜이 묵은 마음. 두 사람은 이 마음을 떠나지 못한다. ‘우진’은 섬에 남은 마지막 어린 염소에게 엉겅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데, 어쩐지 ‘엉겅퀴’에게서 ‘여래’의 모습을 본다. ‘우진’은 ‘엉겅퀴’와 섬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지만 ‘영신’은 그와 ‘엉겅퀴’가 특정도서(무인도서)로 지정될 예정인 섬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웃’은 ‘여래’가 들려주었던 언니 이야기를 기억하며, ‘여래’가 언니에게 빌린 돈을 대신 갚아주려 ‘여래’의 언니 ‘수하’를 만난다. 하지만 돈을 빌린 것은 ‘여래’가 아닌 ‘수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엉겅퀴’는 결국 ‘영신’의 손에 잡혀 배로 끌려가게 되는데, 배에 딸려 오던 ‘엉겅퀴’에게 가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 ‘우진’은 ‘엉겅퀴’와 함께 바다에서 실종되고 만다. ‘여래’의 언니 ‘수하’를 만난 ‘이웃’은 ‘들레’와 함께 섬에 방문했으나 검게 불탄 섬을 마주한다. 하지만 세 사람은 섬에서 염소의 똥과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하며 바다를 헤엄쳐 가는 염소 ‘엉겅퀴’를 발견한다. 희곡은 환상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결말로 멀어진 이들을 추모한다.

     부재하는 자의 속삭임에서 시작한 희곡은 어느새 존재하는 자들의 희미함에 맞닿는다.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자꾸만 중심에서 멀어지고 작아진다. ‘우진’은 애도를 끝마치지 못해 여전히 섬에 머무르지만, 타자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섬에서 일을 하다 사망한 ‘여래’의 죽음은 수많은 산업재해 중 하나로 처리된다. 그의 죽음이 구체성을 잃고 행정 서류 몇 장으로 처리되는 대신, ‘이웃’은 섬의 언저리에서 생계 때문에 미처 다 돌보지 못한 목숨들을 평생 자신의 죄로 안고 살아간다. 그들은 존재함에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가장 크게 말하는 자는 염소다. 순찰정에 붙잡힌 ‘엉겅퀴’는 자신을 놓아달라고 목 놓아 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우진’이 유일하다. ‘엉겅퀴’의 목소리를 듣고 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우진’처럼, 배해률은 아무도 목소리를 찾아내지 못한 비어있는 공간에서 ‘부재하는 자’와 ‘존재하는 자’의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속삭임에 울림을 더하는 진동 

‘속삭임’이 울림이 되어 더 멀리 퍼지기 위해서는 성대를 떨리게 하는 진동이 필요하다. 배해률의 희곡이 부재하는 자와 존재하는 자의 속삭임을 담고 있다면, 리에 나카지마, 정철규, 곽소진, 이경민 네 작가는 배해률이 귀 기울여 담아낸 속삭임을 각자의 방식으로 소리화한다.


     엉겅퀴 (...) 그래, 엉겅퀴. 그렇게 부르던지. ¹


     극 중에서 이름 없는 염소였던 ‘염소’는 ‘우진’이 엉겅퀴 풀을 많이 먹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름을 지어준 이후로 ‘엉겅퀴’라는 이름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염소가 ‘엉겅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후, 비로소 ‘우진’은 ‘엉겅퀴’가 하는 말을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리에 나카지마는 ‘우진’처럼 이름 없는 사물들을 모아 각자 작품으로 이름 붙이고 그들의 소리를 듣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리에 나카지마의 작업이 소리로 먼저 감각된다. 그는 전통적인 음악의 악기가 아닌, 일상에서 ‘버려진 사물’로 인식되어 왔을 법한 사물들을 전시 공간으로 가져온다. 이들은 공산품이지만 갓 만들어진 상태의 사물이 아닌, 찌그러지고, 녹이 슨, 깨진 그릇과 같이 원래 기능이 고장 난 사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장의 흔적은 그들에게 고유한 자신만의 역사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 대상들은 서로 결합되어 더 이상 ‘버려진 사물’이 아닌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알루미늄 자전거〉는 ‘달각달각’ 소리를 내고, 〈두 개의 정사각형 철물〉은 ‘덜덜덜’ 소리를 내며 정해진 시간 동안 소리를 냈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말을 건네는 언어의 음절(syllable)처럼, 대답을 기다리는 침묵처럼 이들은 낯선 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작가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사물의 시점에서 사물 각각이 가진 역사와 목소리를 찾아낸다. 이제 이들은 이 사물을 버렸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관에서 작동하고, 다른 논리로 해석된다.

     리에 나카지마가 사물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정철규는 무명(無名)의 장면들에서 이름을 찾는다. 정철규의 작업은 전시장 우측 벽과 바깥에 위치한 윈도우 갤러리에 자리한다. 희곡의 어느 한 조각을 실과 천, 색연필 등을 이용해 전시장에 불러온 정철규의 작업은 특별하기보단 평범한 기억 속의 장면들을 떠오르게 한다. 면 위에 손바느질을 하여 만든 달력 형상의 작업이 먼저 눈에 띈다. 30일을 마지막으로 끝나는 11월 달력에 31일을 더한 〈지난밤도 지나가는 밤도〉는 과거의 일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과거의 어느 날에 멈춘 ‘우진’의 시간 감각을 보여주는 듯하다. 수풀이 드리운 창밖을 창문 안쪽에서 포착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어요. 1〉,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어요. 2〉는 섬에 혼자 남아, ‘여래’는 죽고 ‘엉겅퀴’가 살아가는 섬이라는 세계를 곱씹는 ‘우진’의 관점을 상상하게 한다. 정철규가 자신의 작업에 초대한 장면들은 수많은 산업재해 중 하나로 처리된 ‘여래’의 죽음처럼 공유되지 못하고 당사자의 경험으로만 존재하는 시간일 것이다. 정철규의 작업은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경험을 그림으로써 조형 언어로 그 장면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리에 나카지마와 정철규가 흐릿한 존재의 흔적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곽소진과 이경민은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이 경험한 부재의 감각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복기한다. 전시장의 가장 깊은 모서리에 위치한 곽소진의 영상에는 앞을 향해 걷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이 앞장서고 또 다른 사람은 같은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 뒤를 바짝 쫓는다. 두 사람의 관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고 보기에는 쫓는 사람의 집요함과 쫓기는 사람의 불안감이 틀림없이 느껴진다. 하지만 반대로 두 사람이 서로를 증오한다고 보기에는 두 사람은 서로를 지나치게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둘은 서로를 추격하면서도, 서로의 걸음걸이를 정확하게 맞춰 걷는다. 영상 작업이 상영되는 벽 바로 우측에 설치된 유광 시트지는 다시 한번 대칭하는 자리에서 추격을 반복한다. 곽소진의 작업은 배해률의 희곡에서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 관계인 서로를 추격하는 관계이자 서로를 애정하는 관계를, ‘여래’를 기억하면서도 한편으로 꿈에 등장한 ‘여래’에게 시달리는 ‘우진’이 경험한 부재가 일으키는 양면적 감정을 긴장감 속에 그린다.

     마지막으로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이경민의 작업 〈물의 방위〉는 공기의 흐름을 조율하면서 관람자의 호흡을 길들인다. 작품은 원형 기둥에 직사각형 목재판이 세로로 붙은 모양의 구조물 세 개로 구성된다. 손으로 밀어 앞뒤를 회전시킬 수 있는 기둥에 달린 직사각형 판은 얼핏 전시장 중앙에 놓인 세 개의 회전문처럼 보인다. 세 직사각형 판의 앞면에서는 세로줄로 구획되어 파랗게 물든 면과 그 면의 끝을 장식하는 원형 스테인리스판을 볼 수 있다. 물이 쏟아지는 듯한 방향성과 원형의 스테인리스판은 서로 다른 차원을 연결하는 구멍을 연상시킨다. 직사각형 판의 뒷면에 주된 재료로 사용된 석고텍스는 바둑판식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드문드문 칸을 비우고 있다. 모자이크 효과가 적용된 것처럼 내부가 보일 듯 말 듯 한 투명 아크릴판과 그 주위를 둘러싼 얇은 각재는 서로 어우러져 창문처럼 보인다. 직사각형 판의 뒷면은 오래된 건축물의 창문과 허물어져 가는 천장을 떠오르게 한다.

     〈물의 방위〉는 희곡에서 이야기의 배경이자 서사를 전환하는 역할로서 ‘물’을 기억하면서 희곡의 인물 혹은 작품을 관람하는 ‘나’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과거-현재-미래, 존재-부재의 관계를 실험한다. 작품의 앞면은 물결치는 파도이자 차원을 연결하는 구멍을, 작품의 뒷면은 사용기한을 다한 시점의 건축물의 한 부분을 연상하게 한다. 작품의 앞면과 뒷면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상징하면서 섬을 떠나는 인물이 타는 물결과 섬에서의 일을 곱씹으며 섬으로 돌아오는 이들이 타는 물결을 교차시킨다. 이경민의 작업은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의 길을 가로막듯 혹은 길을 내어주듯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희곡 안에서 인물이 경험하는 시공간의 교차를 은유한다.


소리들의 변주를 상상하는 숨

숨 없이 소리가 날 수 없듯이,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 없이는 이 공간에서 어떤 소리가 날 수 없다. 전시가 시작되는 텅 빈 곳에서부터 전시를 완결하는 희곡의 2장을 메우는 순간까지 관람자는 수동적으로 전시를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희곡의 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장면을 그린다. 《#2》는 고요 속을 드나드는 숨에게 소리들의 변주를 상상하고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로써 전시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전시에 개입하는 역할로서 자신의 위치를 조율하고 실험할 수 있도록 한다.

     《#2》는 텅 빈 곳에서 이 공간이 어떻게 채워지고 다시 비워지는지, 그 사이에서 공간을 오가는 사람들의 위치는 어떠한지에 대해 질문하면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질문을 전해 받은 배해률은 여기에서 부재와 존재의 목소리를 들었고, 네 명의 참여 작가 곽소진, 리에 나카지마, 이경민, 정철규는 이를 각자의 방식으로 증폭시켰다. 증폭된 ‘부재’의 감각과 ‘존재’의 증거는 배해률이 전해 들은 속삭임을 울림으로 만들어 공간을 채웠다.

     이 과정에서 배해률의 희곡은 텅 빈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가 네 참여 작가가 바라보는 장소가 되고, 네 참여 작가 역시 희곡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가 전시를 보는 사람이 바라보는 장소가 된다. 또한 희곡 원문이 담긴 전시 도록에서 전시 이미지로 대체된 희곡의 2장은, 희곡의 2장을 전시장을 오가는 관람자가 각각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상하도록 이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희곡을 완결시킴으로써 관람자는 참여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희곡 전문으로서 바라보는 장소가 되어, 또 한 번 위치를 달리한다. 이 전시에서 이처럼 거듭 그 시점을 바꾸며 교란되는 참여자의 위치는 여기 관계된 어떤 참여자도 하나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도록 한다.


고요함이 있던 자리에 진동이 더해져 울림이 생기고, 전시가 끝난 뒤 또다시 전시장은 빈 곳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에는 이전과 달리 잔향(reverberation)이 남아있다. 전시가 끝난 뒤 이곳을 드나들던 이들은 빈 전시장에 남은 잔향이 일으킬 또 다른 소리의 가능성을 그려본다. 그 잔향이 부재하는 자와 존재하는 자의 속삭임, 그리고 예기치 못한 누군가의 또 다른 속삭임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앞) 아무도 답하지 않았어요. 2, 2023, 옥스퍼드 원단 위에 색연필, 240 × 700cm ⓒ 최연근

(뒤) 지난밤도 지나가는 밤도, 2023, 와이셔츠 원단 위에 손바느질 실드로잉, 65 × 50cm, 설치 전경 ⓒ 최연근

다시 돌아와, 다시, 2023, 싱글채널 비디오, FHD,컬러, 사운드, 시트지, 10분 ⓒ 최연근

배너 사진: 《#2》, 전시 전경, 두산갤러리, 2023 ⓒ 최연근





참고문헌

¹ 배해률 외 9인#2「염소구제작업」두산갤러리, 2023, p.54

² 본 원고는 '그레파이트온핑크' 출판사의 '그래비티 이펙트 미술비평공모'에서 2위를 수상하여 『GRAVITY EFFECT ISSUE 8』에 수록된 글 입니다. http://graphiteonpink.com/?portfolio_page=gravity-effect-issu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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