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전시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선 Jun 10. 2020

그 세계는 언제나 뒷면을 가지고 있다

전현선 작가 작업에 대한 글


분주하게 움직이던 발걸음이 망설이기 시작했다. 작년 겨울로부터 일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시간에 항복하듯 자리를 내주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¹은 평범하던 일상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뺐다. 장면 속에서 뚜렷했던 방향감각은 비틀거리며 빠져나왔고, 여백의 시간은 한가득 더해졌다. 여백의 시간을 다룰 줄 모르는 우리는 얼빠진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더디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외면할 수 없이 주위를 서성거리던 생각은 ‘만약에-’로 시작하는 가정의 문장이었다. ‘만약에’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여기에 응답하는 확신에 찬 세계를 그릴 수는 없다. 만약이라는 가정이 만들어낸 세계를 나는 영원히 만날 수 없기에. 지금의 내가 ‘마스크를 하지 않은 오늘’을 상상할 수 없듯이, 과거의 나도 ‘마스크를 한 오늘’을 상상할 수 없다.


연두색 들판 위의 분할된 장면들, 산을 가로지르고 찢는 흰 여백, 그 주위를 배회하는 과일과 기하학적 모형들은 일상적인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이질적인 세계와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현실과 전현선 작가의 작업이 만들어내는 교차점이 어렴풋하게 손에 잡힐 듯하다.


연두색 시간, 2020, watercolor on canvas, 145.5 x 97 cm


1 가정의 의문문이 넘쳐흐를 때

그림 속 녹색의 장면들은 분할된 화면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연두색 시간>에서 화면은 반복되는 직사각형의 그리드를 형성한다. 배경의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의 직사각형 속 각각의 장면들은 같은 공간을 다른 버전으로 그리고 있다. <연두색 시간>의 그리드가 만든 직사각형의 왼쪽 위를 보자. 거의 모든 장면에 흘러내리는 모양의 삼각형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세로 1/3 지점에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숫자 시리즈 작업(<0>~<14>)과 <하얀 어둠> 작업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공간을 다룬다. 작업에는 비슷한 산과 하늘과 땅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다만 각각의 작품에서 산은 다른 사물과 함께하고, 다른 그늘 아래 머무른다. 결국 그림은 같은 공간을 같은 시점에서 보았으나 다르게 연출된 상황을, 가정의 문장처럼 여러 가지 장면을 통해 질문한다.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현실 세계에서 한 공간은 동시에 다른 두 가지 상황을 연출할 수 없다. 그래서 그림은 분신술을 사용한다. 각자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장면들은 ‘무엇이 진실일까?’라는 의문문의 문장을 발화한다.


2 뒷걸음질은 더 많은 것을 보게 한다

그림을 나누는 그리드는 심지어 캔버스를 벗어난다. 캔버스 왼쪽과 아래쪽에서 1-2cm 정도의 여백을 남기고 시작되는 <연두색 시간>의 모서리는 그림이 화면 안에 어긋난 위치에서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여기에 더해 실수처럼 종결되는 화면 끝의 그리드는 확실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누군가 캔버스에 정확하게 맞춰 놓은 화면을 드래그해서 캔버스 밖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캔버스를 벗어나는 그림은 캔버스 자체를 의식하게 하고, 결국 장면이 가진 공간감을 얇게 만든다.

     배경에 안착하지 못한 기하학적 도형들과 일상적인 사물들도 붕 떠있는 시점과 그림자를 만들며 화면을 한 겹 더 얇게 만든다. 수채화 물감의 균질한 붓 자국과 다 그려진 장면 위에 튀긴 물감 또한 비슷한 효과를 일으킨다. 그림이 가진 여러 요소들은 화면을 더 평면적으로 느끼게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의 내러티브에 흡수되거나 장면의 실재감에 몰입되는 것을 방해한다. 같은 공간을 매번 다르게 보여주는 장면의 연속과, 몰입하기를 방해하는 다양한 요소들은 그림 속의 수많은 상황을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더 많은 것이 시야에 담긴다. 실재감은 없지만 가능성은 가득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좌) 2, 2020, watercolor on canvas, 45.5x38cm    /    (우) 0, 2020, watercolor on canvas, 194x130.3cm


3 균열이라는 이름의 가능성

화면의 구석구석에는 흰 여백이 있다. <0>에서 흰 여백은 화면을 반으로 나눈다. 흥미롭게도 이 여백은 중심에서부터 시작해 부채꼴 모양으로 화면을 가로지른다. <9>에서 반 씩 붙은 이미지는 의도적으로 상하의 높낮이가 엇갈려있다. 부채꼴의 여백과 엇갈린 상태로 닿아있는 이미지는 슬라이드 쇼의 화면 전환처럼 곧 일어날 장면의 변화를 상상하게 한다. 곳곳에서 버짐같이 피어오른 흰 얼룩 역시 멈춰있기보다는 움직이며 몸을 키워 가는 모양에 가깝다. 운동감 있는 균열은 시간이라는 새로운 축을 발생시킨다. 화면에 침입하며 시간의 축을 드리우는 여백은 각각의 장면이 만들 수 있는 수많은 다른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실재감의 부재가 그림의 장면에 입장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시간의 축은 장면을 비집고 들어오는 미래를 싹트게 한다. 이제 작품이 그림을 넘어서 현재를 바라보는 어떤 태도를 그리고 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현실이 그 장면 하나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심하는 태도, 그 의심을 초석 삼아 가능한 다른 장면을 그려보는 태도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 미래에 대한 믿음’이 과연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지 그림은 조금씩 리듬을 변주하며 우리에게 질문해온 것이다.


4 볼 수 없는 세계는 언제나 존재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시공간의 장면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는 언제나 뒷면을 가지고 있다.

     세계의 뒷면을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소설을 읽듯이 우리는 종종 세계의 이면을 상상한다. 과거의 나는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도, 책장을 덮는 순간 바이러스의 세계를 머리에서 털어냈다. 내가 머무는 세계에 목숨을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창궐할 수도 있다는 순간적인 위기감은 망상의 산물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방심한 사이에 세계는 망상을 자신으로 삼았고, 돌이켜보면 ‘상상은 상상일 뿐’이라는 확신은 어리석었다.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고 믿었던 이야기가 이 세계가 될 수도 있다는, 그리고 내가 그 세계에 속한 사람 이 될 수도 있다는 진실은 견고한 믿음이 모래 위에 세워진 궁전이었음을 깨닫게 했다.

     통계와 숫자는 쉽게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견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H. P. 러브크래프트와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처럼, 직관과 의식의 흐름에 의해 전개된다. 이는 빠르고 정확한 진단과 예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모든 가능성을 쏟아낸 것에 가깝다. 그 가능성은 영원히 다 볼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결국 ‘일어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는 세계’를 암시한다. 내러티브가 희미해진 이유로 이 작업이 어떤 종류의 ‘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말하는지는 수수께끼로 남겨졌다. 그렇다면 볼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진실을 받아들인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사건과 세계를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단정하지 않기를, 모든 뒷면을 차근차근 살펴볼 수 있을 때까지 판단을 유보할 수 있기를 스스로 바라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수 없는 세계는 또다시 존재할 것이라는 진실을 변함없이 마음에 담아두는 일이다.


돌아서기 전, <연두색 시간>을 다시 바라본다. 그 안에는 나란하게 놓인 과일뿐만 아니라 생물도 있다. 날아가는 파리와 잔디 위를 걷는 개미는 사소하리만치 작고, 여러 장면 중 한두 군데에 슬쩍 나타날 뿐이다. 수많은 세계의 가능성에 비하면 인간이라는 찰나의 생물이 머무르고 인식할 수 있는 장면은 딱 이 정도일 것이다. 이제 인간의 한계를 깨달은 우리는 다양한 장면이 일으키는 거대한 가능성 앞에서, 숭고의 감정을 느끼며 작아지게 될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거대한 가능성의 근원적 존재를 탐구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림 속에서 개미 혹은 파리의 탈을 쓴 당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3, 2020, watercolor on canvas, 45.5 x 38 cm












1)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 corona virus disease 19 (COVID-19)은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중국 전역과 전 세계로 확산된,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SARS-CoV-2)에 의한 호흡기 감염질환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