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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선 Mar 15. 2021

계속해서 바라보고 부르고 돌아보기로 해요

이정 개인전: 공통 언어를 향한 꿈 (동덕아트갤러리)


발길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 만나게 돼요. 사람마다 걷는 속도도 시작점도 다르지만 가까워지는 줄도 모르게 서로가 닿는 순간이 있어요. 이전에도 우리는 이렇게 마주친 적이 있었을 텐데, 그때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예요. 잃었던 방향 감각을 되찾으면서 우리는 다시 만났어요. 이제는 같은 마음으로 걷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어요.


옆에서 걷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익숙하게 자리 잡은 주름을 발견할 때면 한동안 멈춰서 본 적 없는 과거를 헤매요. 지나간 시간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요. 눈에 맺힌 날카로운 그림자가 그렇듯, 이 생명을 더 거침없고 강인하게 만든 순간은 언제였나요. 귀의 길을 타고 들어와 당신을 움직이게 하고 분노하게 한 말은 무엇이었나요. 당신의 머리, 흉터, 피어싱과 튼 입술. 당신의 모양을 통해 조금씩 몰랐던 세계를 만나요. 그리고 몰랐던 세계에서 낯익은 이야기가 들려올 때, 서로를 알기 전부터 당신과 내가 우리였다는 걸 깨달아요. 이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간의 이념을 배반하죠.


길을 걷는 와중에 누군가 나를 부를 때면, 앞을 향하던 시선은 주변으로 확장되고 넓어진 시야는 지금 서 있는 곳을 느끼게 해요. 당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진동이 일어나고, 크고 작은 진동이 모여 가는 길을 정렬해 주죠. 변화에는 늘 나를 부르는 누군가가 있어요. 그리고 나를 불러준 그 사람들로 인해 나도 누군가를 부를 수 있게 돼요. 부르기와 돌아보기는 끝없이 이어지고, 당신이 돌아봐 서로 눈이 마주칠 때 나는 얼굴에 또 다른 표정을 하나 새겨요.


우리가 서로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여기서부터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았을 거예요. 누구에게 더 많은 눈길을 내어주고,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하는지 알아볼 수 있게 된 거니까요. 이제부터 이 눈으로 당신을 더 자세히 보고 작은 움직임까지 기억할 테니 여러 불빛 아래서 가장 많은 당신을 보여줘요.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긴 만큼 우리가 함께했던 사물도 같이 보았던 형상도 점점 희미해져 가요. 하지만 이 문장만은 갈수록 선명해져 당신 주변을 맴돌 거예요. 때때로 당신이 누군가를 부르고 어딘가를 돌아볼 수 있게 해줄 거예요. 곁에서 걷는 서로를 기억하게 할 거예요. 그렇게 우리 계속해서 서로를 바라보고 부르고 돌아보기로 해요. 더 많은 사람이 서로를 보도록 만들기로 해요.


그럼 다시 얼굴을 봐요.


(좌) 새한, 2021, 캔버스에 유화, 116 x 61 cm    /    (우) 란탄, 2021, 캔버스에 유화, 116 x 61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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