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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선 Oct 14. 2023

눈 오는 날, 발자국을 따라 걷는 사람

박시월 개인전: 본적도 없으면서 (유영공간)


눈 오는 날의 발자국은 금방 사라진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 남긴 희미한 흔적을 따라 걷는 사람이 있다. 어떤 날은 다른 것을 발자국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그 곁을 지키는 눈사람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눈 위에 남아있는 발자국에 제 발을 맞춰보니 발의 크기도, 신발의 모양도, 걸음걸이도 다르다. 꼭 맞지 않더라도, 눈 위에 움푹 파인 자국을 따라, 그는 계속 걷는다.


박시월은 아름다운 순간을 바라보는 사람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맞춰보곤 한다. 작가는 ‘아름다움이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타인의 ‘아름다운 순간’을 수집해 왔다. 어느 날 엄마가 기억하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엄마와 나' 사이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된다. 엄마는 시월을 임신했을 때 본 태몽을 떠올렸다. 작가는 뜻밖에 자신이 연루된 장면을 마주한다. 작가의 눈앞에, 그녀에 대한 서사와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킨 채 나타난다.


엄마의 발자국에 제 발을 포개어 보지만 ‘엄마와 나’, 두 사람에 대한 수많은 질문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장면과, 그 장면 이후로 맺어온 두 사람의 관계를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 떨어져서도 본다. 바쁘게 뛰어가며 이리 보고 저리 보면 그 많은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월은 함께 보지 못해 그 기억에 다다를 수 없는 자신을, 그 순간이 ‘아름다운 순간’일 수 있었던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을 마주할 뿐이다.


몰아치는 눈발에 발자국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길 위에 홀로 남겨진 그는 방향을 잃었고, 발자국의 주인도 만나지 못했다. 아쉬움에 사로잡혀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던 찰나, 문득 눈 위에 흐릿하게 남아있던 발자국의 형상과 그 위에 발을 맞추던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발자국과 자신의 발자국 사이에는 틈이 있었다. 그 틈을 보기 위해 움푹한 자국 위에 발을 맞추고 있었나.


그 틈에서 두 사람 사이의 닿을 수 없는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차이를 들여다보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해 그는 다시 발자국을 찾아 걷기로 한다. 모든 것이 눈발에 흩어져 버릴지라도 다시 걷기로 한다.


좌)이식된 꿈, 2023, 종이에 연필, 유리, 162.2x112.1cm, 우)온몸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2023, 종이에 연필, 유리, part1: 42x59.4 ⓒ 유영공간
닿을 데 없는 발자국, 2023, 종이에 연필, 유리, 30x30cm, ⓒ 유영공간

배너 사진: 본 적 없는 꿈, 2023, 종이에 연필, 파스텔, 유리, 162.2x336.6cm, 전경사진 ⓒ 유영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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