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After Life>의 스포가 일부 담겨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위잉! 이른 새벽녘 단잠을 누군가 깨운다.
어디선가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 아이들 피아노 의자에 올려둔 내 핸드폰은 전원이 꺼져 있다.
사면의 벽을 타고 울리는 진동음은 내 방에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
아무래도 윗집 방바닥에 놓아둔 핸드폰이 어서 일어나라 아직도 누워 있나, 채근하고 독촉하며 주인을 깨우는 중인 듯하다. 의도치 않게 아랫집에서 곤히 잠든 나까지 눈을 뜨게 만들었으니 알람 효과는 만점이다.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쉽사리 눈이 감기지 않는다. 윗집의 알람 소리는 애꿎은 나만 깨우고는 지 주인은 깨우지 못했나 보다. 10분 가까이 부르르 울려대는 것을 보니.. 타고난 잠귀가 어둡거나, 밤도둑이 드나들어도 모를 정도로 곯아떨어졌거나, 자신의 핸드폰과 각방을 쓰거나 셋 중의 하나일 듯하다.
이런 잡념이 글로 쓰일 정도로 머릿속에 새겨졌으니 다시 잠들기는 영 글렀다.
부스스한 몸을 일으켜 찬물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찬 보리차를 벌컥 들이켜고 내 방 회전의자에 앉아 무뚝뚝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본다.
아침잠이 고픈 나로서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잠을 설친 하루의 시작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의자 등받이에 맥없이 고개를 누이고 퍼져 있다가 일단 노트북을 켜본다.
두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집을 나서서는 가까운 극장으로 향하곤 했다.
조조로 상영하는 영화의 티켓을 끊어 텅 빈 관객석에 앉아 순백의 스크린을 마주하면, 지난밤의 숙취와 피로가 천천히 씻겨 내려가는 듯한 경건하고 엄숙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다. 감긴 눈을 뜨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끌벅적한 광고 영상과 두리번대며 자리를 찾는 몇몇 눈먼 관객의 입장에 산통을 깨지만, 그 정도는 너그러이 넘길 수 있다. 낮게 깔리는 정적과 침묵이 장악한 객석에 홀로 앉는 것만큼 외롭고 지루한 것은 없으니까. 자칫하면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깊은 잠에 들거나, 적적함을 못 견디고 어둑한 상영관을 뛰쳐나갈 수도 있으니까. 드문드문 거리를 띄운 객석이 한 칸 두 칸 채워지는 것에,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광고의 행렬이 끝나감에 안심하는 사이, 주위를 밝히던 조명들이 꺼지고 스크린에 오프닝이 떠오른다.
조조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15인치 노트북에 적당한 영화를 올려 본다.
요란하지 않고 법석 떨지 않고 조용히 감상하다가 여차하면 몰려드는 잠을 청할 수 있는 그런 정적인 영화.
퍼뜩 한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왜지? 하필이면 그 영화가 불쑥 떠오른 건.. 그 이유를 물을 새도 없이 내 무의식과 어렴풋한 기억이 강력 추천하는 그 영화를 스크린에 올린다.
결혼하기도 전이었지. 아마도..
주말 오후, 이대 캠퍼스의 유리 건축물 지하에 숨은 '아트하우스 모모'를 물어물어 찾아, 가파른 경사로 깎인 객석 어느 자리에 홀로 앉은 그날. 다소 어둡고 희뿌연 베일에 싸인 듯한 그 영화는 시작한 지 30분도 채 안 되어 지지직,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상영관의 불이 켜지고 담당 스태프가 나와 정중히 사과했다. 다행히 필름 문제가 아닌, 영사기 문제로 인한 돌발 사태..
재상영이 이루어지기까지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중도에 끊어진, 2시간 남짓한 러닝 타임 동안 다음에는 진한 커피를 가져오리라 다짐하며 문득 졸다가 깨었다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몽롱한 기분으로 망자들의 이런저런 고백에 귀를 기울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After Life>.
그날 이후, 언젠가 다시 보리라 예감했지만 십여 년의 간극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여기저기를 헤매는 기분으로 처음 이 영화를 접했다면, 지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전작全作을 한 편 한 편 아껴 보았고, 모든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다.
낭랑히 울리는 종소리, 죽은 자들은 짙은 안개를 뚫고 낡은 건물로 하나 둘 들어선다.
그들을 반기는 건 섬뜩한 저승사자가 아닌, 살가운 인상으로 책상 맞은편에 앉은 평범한 자들.
거듭되는 일대일 면접 아니 대화를 통해 두런두런 풀어놓는 망자들의 소중한 추억들.
수많은 추억들 중에 '오직 하나'만을 간직하느냐, 아니면 온전히 모두를 기억할 것이냐를 택함에 따라
극락왕생할 것인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애매모호한 중간 세계에 남을지가 정해진다.
세상을 등진 자들의 마음은 제각각이다.
별 고민 없이 한 가지 추억을 고르는 자, 선 문답하듯 창밖에 핀 벚꽃을 건너보고 탁자 위에 이런저런 잎새와 가지, 열매를 늘어놓는 할머니. 자신은 특출난 기억이 없노라고 난감해하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당신들의 독단적인 체제에 순응할 수 없다고 아예 선택을 포기하는 맹랑한 젊은이도 있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세상에 남은 애인의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했음을 깨닫고는 밤하늘에 뜬 달을 올려보기도 한다. 유명을 달리한 지 수십 년이 지나서야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해 그의 뒤통수를 후려친 깨달음이라니..
천장의 통창에 비친 그 달빛은 여느 밤과 달리 유난히 밝고 환했으리라.
저 편의 세계에서도 다른 이의 생을 바탕으로 한, 짤막한 영화를 만드는데 저리 많은 손길이 오가고 시행착오를 저지른단 말인가. 인공적인 CG가 가미되지 않은, 스태프들이 공들여 쌓아 올린 '단 하나의 추억' 속 그 공간이 고스란히 재현됨에 따라, 망자들은 사무치는 회한과 함께 자신의 진정한 죽음이 성큼 다가왔음을 깨닫는다. 며칠 후, 낡은 영사기가 돌아가는 단출한 상영관의 불이 꺼졌다가 다시 켜지면 붉은 벨벳 의자는 텅 비어 있다.
잠시 전까지 앉아있던 누군가의 따스한 온기와 오목하게 눌린 자욱이 여전히 남은 채로..
자리를 뜨지 않고 단숨에 몰아보기가 수월치 않은 잔잔한 영화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흐릿한 눈이 깨어오고, 자욱한 안개에 가린 머릿속이 맑아진다. 하루가 저무는 밤보다는, 새로이 시작하는 아침에 어울리는 영화였던가. 극 중 말미에 통창을 채운 초승달의 그늘이 걷혀 보름달로 바뀌더니 푸른 하늘이 이를 밀어낸다.
영화는 어디서 보느냐, 홀로 아니면 누구와 함께 보느냐 또는 삶의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을 달리한다. 미묘하게 또는 급격하게 틀어지는 그 느낌들.
한 영화를 여러 번 본다는 것은 시공간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같은 장면에서도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다는 묘미 이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한 해에 쏟아지는 전 세계의 영화는 수천 편 이상.
바쁜 일상에 틈을 내어 한 영화를 골라 보기도 힘든데, 같은 영화를 다시금 찾아보는 수고로움을 견딘다는 건 보통 인연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내가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닌, 그 영화 아니 '그녀'에게 간택을 당하는 입장일지도 모른다. 아차, 여태껏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둔한 놈 같으니. 한두 발씩 삐끗하고헛디디면서 당도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뒤늦은 한숨소리와 공중에 퍼지는 그녀의나른한 담배 연기..
그녀는 때가 되면 저 달이 차오르듯이, 무심했던 날 부르고 소환하여 VIP 관객석에 외따로 앉히고는, 오직 나를 위한 스페셜한 상영회를 여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네 차례야. 간만이네. 어언 십 년 만인가. 이른 아침이지만 부디 졸지 않고 끝까지 보길 바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고혹한 자태를 머금은 그녀는 윗집의 요란한 진동과 뒤섞인, 나지막한 인사말을 귓가에 흘리면서 잠이 덜 깬 날 홀리고 유혹한 것이리라. 난 어찌할 도리 없이 몽유증이 도진 것처럼, 그녀가 내민 창백한 손을 맞잡고는 터벅터벅 걸어간다. 어딘가의 스크린 앞에 마주 앉혀져 날 애타게 기다리던, 그녀의 수줍은 맨 얼굴과 조우하고, 베일에 가리인 첫날밤을 다시금 치르는 것이다.
그녀는 제대로 맺은 끝인사를 남기지도 않고 훌훌 떠나갔다. 처음 만남에도 삽시에 어둠으로 사라져 여운을 남기더니 변한 것은 없었다. 오늘부터 셈하여 십 년 후에도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는지. 언제 어디에서 재회할지 감히 확답은 못하겠다. 내가 애쓴다고 울며불며 매달린다 한들, 등 돌린 그녀가 곧장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다시 말하지만 난 아무 힘이 없다. 단지 그녀에게 선택을 받는 입장일 뿐..
천운이 따른다면, 타고난 내 명이 그만큼 길다면 어느 새벽녘, 내 방의 천장을 시끄러이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선잠을 깰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녀가 더 이상 날 찾지 않는다 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죽기 전에 '오직 한 편'의 영화를 선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영화에 대한 기억만을 간직하고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있다면.. 난 주저 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원더풀 라이프>..
혹자는 말합니다. 진정 좋은 영화는 끝이 나고서야 비로소 시작된다고..
<원더풀 라이프> 또한 그렇습니다.
말미에 이르러 호명당한 어느 망자가 면접장의 문을 열기도 전에 영화는 암전되며 엔딩 크레딧으로 이어집니다.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하직할지 우리는 아무도 예상을 못 합니다.
만약 저 세상의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동안 살면서 가장 소중한 추억이 무엇이냐고 다짜고짜 묻는다면 어쩌겠습니까? 오직 그 추억만을 가지고 저승으로 떠날 수 있다면, 하나의 기억만으로 사후의 삶을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그 대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 추억들을 되짚고 되살리는데 긴긴 시간이 걸리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끝끝내 그 추억들 중 하나를 콕 집어내지 못해 어중간한 중간계에 오래 머물러야 할지라도요.
그렇다면 오늘 하루, 스치는 매 순간에 밑줄을 치면서 의미 있게 살아야겠습니다.
긴 시간이 흘러도 서가에 남을만한 고전은 좋은 문장에 밑줄을 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매 문장 하나하나가 도드라지고 여백과 행간마저 빛을 내뿜어, 밑줄을 치다 보면 책 전부가 너덜해지기 때문이지요.
몇 문장으로 간추릴 수 있는 생보다는, 전체 인생이 하나의 끝나지 않을 추억으로 기억되는 삶.
사후에 뒤돌아본 제 인생도 그렇게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가까이 얽힌 제 가족들도 그렇게 제 삶을 떠올렸으면 하는 크나큰 바람까지 품어 봅니다.
세월이 흘러 그 굳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 영화가 절 찾아 주었으면 하네요.
더 이상 연이 닿지 않아, 또는 그 만남을 고대하는 이가 차고 넘쳐 그녀가 절 찾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그녀를 다시 접할는지 모르지만, 십 년이 흘러 적절한 시기에 이렇게 재회한 것만으로도 천운이라 여기니까요. 갈수록 탁해지는 마음에 잊을까 두려워, 그 이름을 되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