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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과경계 Jun 22. 2024

자기혐오의 노래

시집살이 노래와 자기혐오

                                                                                                                                                                                                                                                                                                                                                                                                                                                

어린 나이에 시집온 며느리는 낯선 시집에서 그들과 동거하면서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한 기나긴 시간을 살아야 했다. 이 과정을 참고 견뎌내야만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모진 시집살이를 살아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시집살이 노래 가운데는 그 혹독한 현실을 겪고 난 자로서 노래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시집살이 노래로 알려진 <형님형님 사촌형님>이다.


성님성님 사촌성님/시집살이 어떻던고

시집살이 말도마라/말끝마다 눈물이라

벙어리라 삼년되고/봉사되고 삼년되어

석삼년을 살고나니/머리털이 다시었단다


“형님형님 사촌형님 시집살이 어떻던고”라는 질문과 대답으로 노래는 진행된다. 시집살이에 대하여 물음에 “말끝마다 눈물이라/벙어리라 삼년되고/봉사되고 삼년되어/석삼년을 살고나니/머리털이 다시었단다”라고 답한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판단한다는 것이고 귀로 듣는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인데 이 모두가 불가능한 상태로 살아야만 시집살이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렇게 견뎌낸 결과로 가족이 된다. 그 결과 나는 어떤 상태인가?  머리털이 다시었다가 함축하는 의미는 다양하다. 젊음에서 늙음의 시간으로, 청춘의 열린 시간에서 죽음을 종말을 앞둔 노년의 시간에 선 자신의 모습을 만한다. 피폐하고 노쇠한 육체와 정신을 의미한다. 


노래의 관용적 표현인 벙어리 삼 년, 봉사 삼 년으로 살았더니 머리털이 다시었다라는 말은 자조적이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며 살다보니 보고 들으며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겪어온 세월이 무심하게 전하는 이 노래의 노랫말에는 그 어떤 전망도 없다. 다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아야 가족으로 살 수 있었다는 당위만이 있다. 


시집살이는 공동체가 요구하는 역할로 자신을 한정지으며 살았다. 대신 부권이 부여하는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삶이다. 그 과정을 생존의 길이라 여겼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왔다. 이것이 바로 며느리가 자기혐오를 내면화하게 된 이유다. 


형님오네 형님오네/형님마중 내가가지

니가우째 반달이냐/초생달이 반달이지

형님형님 사촌형님/시집살이 우떻던가

시집살이 좋더고만/행지치매 죽반인가

콧물눈물 닦았겄네/삼단같은 이내머리

비소리춤이 다되었고/분칠겉은 이내손이

북도가두미 되었구나/샛별겉은 이내눈이

당달봉사되었구나


‘시집살이가 어떻든가’라는 질문에 화자는 행주치마에 콧물눈물을 다 닦아가며 시집살이를 살고 보니 삼단같은 머리는 빗자루처럼 되었고, 고왔던 손은 거칠고 투박하게 변했으며 샛별같이 총명하던 눈은 봉사처럼 되었다고 답한다. 


화자의 답변에서 시집살이 전후로 나누어지는 여성의 자기 인식과 만나게 된다. 시집살이를 겪어내기 전의 ‘나’가 정상적인 형상을 하고 있었다면 시집살이를 통과한 ‘나’는 비정상적으로 변하고 만다. 


화자는 자신의 피폐하게 만든 구체적인 맥락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따지거나 판단하지 말자는 것일까. 부당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들 그렇게 견디고 살았다고 자위하는 것인가. 


노랫말은 시집살이의 결과로 변하게 된 자기 모습에 대해서만 적극적으로 말한다. <형님형님 사촌형님>에 관용구로 등장하는 ‘벙어리’, ‘봉사’ 등이 그러하다. 벙어리와 봉사는 비정상을 은유한다. 비정상은 차별과 배제를 의미한다. 


노랫말 속 화자는 비정상을 자처한다. 모함을 받아 억울해도 그저 못 들은 척, 못 본 척 살아야 하는 것이 시집살이라고 말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고... 자기 연민이자 정당화의 역설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자기 비하는 자연스럽게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형님형님 사촌형님>의 노랫말에는 시집살이를 당연하게 견디고 겪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되고 있다. 현재 나의 신체는 더 이상 피폐해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지만 그 결과 정상가족 즉 부계 혈통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점에 안도한다. 시집살이 구연 현장에서 만나는 여성들의 의식에는 이런 양면성이 포착된다. 


“비소리춤이 된 머리, 북도가두미가 된 손, 당달봉사가 된 눈”과 같은 자기혐오적인 비유는 <형님형님 사촌형님> 유형의 노래를 변별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 자기혐오적 표현은 자기 동정이자 자위하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자기혐오의 증표다. 


연민을 촉발하게 만드는 탄식으로 전하는 비정상적인 자기 비하의 표현은 통과의례를 겪어낸 자로서의 자긍심도 동시에 함의한다. 부계 혈통 가족의 질서에서 인정하는 정체성을 획득한 자리에서 그 모진 시절을 겪어낸 자로서 말하고 있다. 어떤 각편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낸 자로서의 자긍심이 포착되기도 한다. 

                                         

시집살이 노래에는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 자긍심 등이 공존하여 나타난다.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자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과 욕망이 자리한다. 혐오는 언제난 내 집단에 대한 강력한 결속감과 타 집단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만으로 이분법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도 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과 의식은 공존한다. 다만 내가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돌출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다른 얼굴로 위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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