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은 Jul 03. 2020

슬기로운 복붙생활

재택근무의 시대



벌써 302번째 Ctrl+c, Ctrl+v를 누르는 중이다. 다른 키들은 쉬는 동안 ctrl, c, v만 열심히 일하니, 아마 키보드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연봉협상 따따블을 부르짖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일할 때엔 아무리 복붙을 많이 해도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장기간 재택근무의 효과는 이런데까지 발휘되고 있다.

문득 ‘생각은 곧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며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격이 되어 결국 운명이 된다.’는 문장이 떠오른다. 누가 한 말일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간디가 말했다고도 하고, 노자가 말했다고도 하고. 인터넷 세상의 정보는 언제나 뒤죽박죽이다.


누가 말했던지 간에, 이 문장에 따르자면 내가 매일같이 반복하는 복붙행동은 곧 내 습관과 성격이 되고 결국은 내 운명이 될 예정이다. 복붙하는 운명. 듣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단어의 조합이다.

내게는 안타깝게도 어떤 문장이 유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문장이 예언한 대로, 복붙하는 나의 일생생활은 점점 복사-붙여넣기의 굴레로 접어들고 있다. 내가 복붙하는 행동을 자주 해서 이런 생활을 하게 된 건지, 아니면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복붙하는 행동에 주목하게 된 건지 선후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내 일상이 지나치게 단조로워졌다는 것이다.

적어도 출퇴근을 할 때에는, 매일 타는 버스가 다르고, 매일 먹는 점심 메뉴가 다르고, 매일 가는 카페가 다르고, 퇴근 후에 들리는 장소가 달랐다. 집에서의 삶과 회사에서의 삶이 달랐고, 주중의 삶과 주말의 삶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택근무가 4개월을 넘어서며, 어제와 내일이 복사 붙여넣기를 한 것 마냥 같아졌다.

애초에 내가 의도하지 않으면 밖에 나갈 일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집이고, 일할 때에도 집이고, 밥 먹을 때에도 집이고, 쉴 때에도 집, 놀 때에도 집이다. 이젠 더 이상 집과 회사의 경계가 없고, 주중과 주말의 경계가 없다.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라는 뜻의 일상(日常 )과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생활이 또 있을까. 내 일상은 갈수록 지나치게 일상적이다.

언젠가 집-회사-집-회사의 루트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4개월을 보냈지만,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니 앞으로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오랜만에 회사 직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앞으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앞으로 재택근무가 당연해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느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 대부분의 회사가 자신만의 공간에서 일하도록 변화해갈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화수를 떠놓고 회사로 복귀하게 해 주세요 비는 것이 아니고, 매일 나 혼자 집에서 일하더라도 삶이 재미있어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런저런 고민들을 해 본 끝에 비록 회사 업무는 복붙 하더라도, 일상까지 복붙 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을 해보기로 했다. 이 달의 방법은 출퇴근 대신 매일 다른 길로 산책하기, 다양한 반찬 주문해서 먹어보기, 홈카페 도전해보기.


키보드로 말하자면, ctrl+c, v가 가져다준 복붙 생활을 ctrl+x 하기로 했다. 일상에 활력을 줄 어떤 것들을 적극적으로 ctrl+f 해보고, 내게 익숙한 모든 것들을  f5 하면서 재택근무가 가져온 복붙일상에 새로운 지평을 ctrl+o 할 것이다.

한 번도 풀어보지 못한 문제가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루트가 집 다시 집, 그리고 집 또는 집뿐이라면. 우리는 일상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 ctrl + c : 복사

* ctrl + v : 붙여넣기

* ctrl + x : 잘라내기

* ctrl + f : 찾기

* ctrl + o : 열기

* f5 : 새로고침


작가의 이전글 필사의 여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