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장애를 잡아먹은 커다란 미소
나의 오른팔이 순간 땅속을 뚫고 들어간 줄 알았다. 마치 꿈속인 듯 몽롱하면서도 팔이 저린 고통이 느껴졌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 주위로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00아, 괜찮아? 어머! 어떻게 해. 누가 빨리 체육선생님 좀 불러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스르르 눈이 감겨왔다. 꿈속에서였을까? 난 끝이 보이지 않는 회전 미끄럼틀을 타고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너무 어지러웠다. 이후 눈을 떴을 땐 정형외과 내 입원실이었다.
마치 뾰족한 바늘로 내 온몸을 쑤시듯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때까지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 채 그저 이리저리 몸만 뒤척이고 있었다. 그때 침대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어디선가 엄마가 다가와서 물었다. “너 괜찮니?”라고.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너무도 기가 막혔다. 내가 학교 운동장 안에 있는 화단 울타리 위를 걷다가 그만 화단 쪽으로 쓰러지면서 오른팔이 꺾였고, 운이 없게도 팔뚝 가장 위쪽의 뼈가 심하게 부러졌다는 것이다.
그날은 중학교 입학 후 첫 체육대회가 있던 날이었다. 친구들과 점심식사를 한 후 운동장으로 나가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한 친구와 화단 울타리 위를 누가 안 넘어지고 끝까지 갈 수 있는지 내기를 걸었다. 그 울타리 높이는 불과 땅에서 40㎝ 정도 됐을까? 그냥 옆으로 폴짝 뛰어내려도 우스운 높이건만 그 높이에서 팔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아마도 그 순간 현기증이 난 것 같다. 이후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고, 다만 중간중간 필름이 끊긴 듯 몰려드는 사람들, 체육선생님, 부목과 붕대의 기억이 전부였다.
몇 시간에 걸쳐서 대수술을 했다고 한다. 뼈가 심하게 부러진 데다 몇 개의 조각난 뼈를 맞추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단다. 아마도 회전 미끄럼틀을 타고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었던 기억은 수술하는 과정에서 내가 느꼈던 심리적 불안감이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입원 기간이 한 달 정도로 무척 길었다. 매일 세 끼를 환자용 식사로, 그것도 한 달을 때워야 했고, 하루에 두 번 4대의 주사와 매 끼니마다 먹어야 하는 약들로 온몸이 도배질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내 곁에 가족들과 친구들이 늘 함께 했기에 그 힘든 시기를 잘 넘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짓궂은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곧장 달려와 외로웠을 나를 위해 즐거움이 되어주곤 했다. 병실이 낮에는 수다 장소로, 밤에는 공연 무대로 변하면서 병원 내에서도 눈엣가시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하지만 따분하고 지루해하던 일부 환자들에게는 나름 활력을 불러일으켜준 역할도 한 셈이다. 그렇게 입원한 지 3주 정도 됐을 때 몇몇 환자 분들과 친해지면서 동병상련의 위안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그분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별의별 사연들을 다 가지고 있었다.
어떤 할머니는 밤에 길을 가다가 용달차에 치였다고 한다. 그 순간 운전자가 얼른 차에서 내려 자신의 생사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금세 차에 태워 다리 밑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누인 채 저만치서 자신을 향해 차를 몰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심하게 다치는 것보다 아예 죽는 것이 이후 덜 복잡해지기 때문에 아마도 그 운전자는 자신을 아예 죽이려고 다리 밑으로 데려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약간의 의식이 있었던 터라 손을 위로 쳐들고 있는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쳤단다. 그때 자신을 향해 돌진하려던 운전자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바로 자신의 앞에서 차를 멈추고는 곧바로 이곳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져 인공 철심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다니 너무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동안 병원에서 지내다 보니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우리 시회 곳곳에서 벌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도 그 병원에 오게 된 사연들이 무척이나 다양했다. 의자를 딛고 물건을 내리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고관절이 골절된 사람, 교통사고로 갈비뼈가 골절된 사람,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양팔이 모두 골절된 아이, 허리디스크로 인해 눕는 것조차 힘겨운 사람, 공사 현장에서 떨어져 온몸에 다발성 골절을 입은 사람 등등 내가 겪는 고통은 그야말로 새발의 피 정도밖에 안됐다. 여하튼 한 달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그곳의 환자들과 많은 얘기들을 나눴고, 나름 인생 수업까지 덤으로 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꽤 많은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어둑해질 때쯤 내가 있는 병실이 하도 시끌벅적하다 보니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했던 모양이다. 어느 훈남 스타일의 젊은 남자가 내 병실로 찾아왔다. 한쪽 팔은 나처럼 길게 깁스를 하고 있었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시도했다. 나의 몇몇 친구들은 그 젊은 남자를 보는 순간 쑥스러웠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워낙 잘 생겼고, 말솜씨도 뛰어났으니까 말이다. 알고 보니 그는 대학생이었고, 사고로 인해 나와 거의 같은 위치의 팔의 뼈가 골절된 상태였다.
여하튼 내 친구들은 그 대학생이 너무 맘에 들었는지 계속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인은 있는지, 집은 어딘지, 대학교 몇 학년인지, 군대는 갔다 왔는지 등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얘기하다가 아차 싶었는지 친구들은 각자 집으로, 그 대학생 역시 자신의.병실로 돌아갔다. 그렇게 그날 밤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그런 소중한 밤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퇴원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환한 미소의 대학생이 찾아와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앞으로는 아프지 말고, 예쁘게 살아요.”라고. 나름 참 힘이 되어주는 말이었다.
나는 그 대학생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뒤 간호사실로 감사인사를 전하러 갔다. 그때 몇몇 간호사들이 그 대학생 얘기를 하면서 참 대단하다고 칭찬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 왜 그런지 이유를 물었고, 이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대학생은 영원히 팔 장애를 갖고 살아가야 될 거라고, 그래도 늘 환한 미소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난 전혀 몰랐다. 그 대학생이 영원히 팔 장애를 갖고 살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좀 더 얘기를 들어 보니 같은 곳이 세 번이나 골절됐다고 한다. 두 번째로 골절됐을 때, 깁스를 풀고 퇴원하다가 그만 문에다가 정통으로 찧는 바람에 그 자리가 다시 골절됐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골절됐을 땐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먼 길을 와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학생의 환한 미소는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난 그의 미소를 보면서 머지않아 나와 같이 이 답답한 깁스를 풀고 자유를 찾아 떠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시는 예전, 그 정상적인 팔로 돌아올 수 없다니……. 퇴원한 이후에도 줄곧 그 대학생의 환한 미소가 떠오르곤 했다. 아니, 지금도 그 미소는 내 삶의 한 조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그의 커다란 미소, 그 미소는 마치 장애를 잡아먹은 듯 나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